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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약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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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약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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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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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텅 빈 집안에서 한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굳이 할 일도 없는지라, 노느니 염불 외운다는 마음으로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학교 갔던 아들이 인사말과 함께 들어왔다. 심심하던 차에 말상대라도 삼고자 치근거려봤으나, 귀찮은 듯이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데,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다는 뜻이 다분히 배어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사내 녀석이라 듬직한 값을 한다고 말을 붙여봤는데 듬직한 것이 아니라 무거웠다.

이번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딸아이와 대화를 나누려 시도했다. 계집아이라 그런지 쌀쌀하기 그지없는 것이, 내말을 탁구공 되받아 치는 것처럼 받아쳤다. 한때는 보금자리 안에서 녀석들이 꼼지락대며 칭얼거리는 것이 귀엽기도 했었는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며 녀석들에게서 솜털이 빠져나가면서 지금은 채 여물지도 않은 날갯짓을 해대며 품안서 빠져나가려 한다.

아침에 등교하는 애들에게 한눈팔지 말라,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 하며 주의를 주어도, 듣는 등 마는 등 하는 것이 나의 말에 면역력이 단단히 생긴 것만 같았다. 저 녀석들이 어릴 적만 해도 내 말이 제대로 먹혔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도깨비불에, 내가 꾸며내는 제대로 뿔 달리고 외눈박이인 도깨비를 섞어서 조제하여 들려주는 말도 녀석들한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밤에 잠 안자고 마루와 방으로 뛰어다니던 녀석들이 괴기스럽게 얘기하는 내 말을 듣고는 이불 속에 숨어서 두 눈만 말똥거리다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하였다.

어린애들이 말을 듣고 안 듣고 할 것이 있겠냐마는 칭얼대기라도 할 때, 착한 어린이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양말 속에 선물 운운하면서 내리는 나의 엉터리 처방도 기가 막히게 먹혀들기도 했었다. 녀석들이 좀 자라는가 싶더니 내가 조제하는 약이 녀석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도깨비 얘기 좀 할라치면 도깨비 뿔을 잡아 흔들 것 같이 소란을 피웠고, 공포에 떨게 했던 달걀도깨비는 장난감으로 여길 정도로 면역력이 생겼다.

약의 강도를 한 단계 높인답시고, 내가 어렸을 때 겁먹었던 ‘요괴인간’이며 코 뾰족하고 주름살 접힌 마귀할멈의 음침한 별장에서의 얘기를 내 몸을 떨어가면서 효과음을 넣어가며 얘기를 하니, 늦은 밤에 겁먹기는커녕 동화 들려주는 짝이 나고 말았다. 아예 한수 더 떠서 하나만 더 해 달라고 졸랐다.

아이들이 내 말을 잘 듣게 하려는 처방책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며 무서운 얘기 들려준 것이, 아이들 귀에는 동화책으로 변질되어 들린 것이다. 하나만 더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 쓰디쓴 약 쉽게 먹이기 위해서 겉을 단맛으로 덮은 당의정 하나만 더 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약의 강도를 더 높여서 ‘월하의 공동묘지’라든가 기타 으스스할 정도로 무서운 얘기를, 내 등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얘들한테 들려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약효가 전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오진을 내린 것이 아닌가 싶어 환자를 다시 진맥하는 마음으로 얘들한테 물어보니, 요즘은 무서운 것은 학교에서의 왕따, 불량급식, 선생님의 무관심 같은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여태껏 내가 아이들에게 내린 처방이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내린 처방전을 참고삼아 약을 조제하는 무사안일의 처방을 한 것이다. 애들이 무관심을 보였을 때 다시 한 번 진찰을 했어야 했는데, 나의 사고력만 믿고 엉뚱한 처방을 내리고서는 약효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우를 범한 것이다.

아이들도 자라서 이제는 소아병이 아닌 성인병 처방전을 쓰듯이, 어렸을 때의 무서운 얘기가 아닌 성인의 인생 상담에 맞는 처방을 내려서, 약효가 제대로 먹힘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사회가 원하는 모범적인 아이들로 키워야 했다. 그렇지만 자식들이 학교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고 경찰서에서 잘못된 일로 부모 오라는 연락만 없어도 약효는 잘 먹혔다고 본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종종 월세 낼 돈도 없다는 이들이 미용실에서 고액의 돈을 주고 머리를 하고 나올 때, 매일 비싼 브랜드의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드라마를 종종 본다. ‘저건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실력 없고 불쌍한 약사(?)에게는 아이들과 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즐거운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것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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