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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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누님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3.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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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김포 문수산 끝자락 용강리에 육촌 누님이 사신다. 집안에 큰일이나 있어야 만나 뵐 수 있는 누님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많은 형제들 틈에 섞여있던 나를 그 누님이 알기나 했었을까. 연세가 많아서 항시 어려웠다. 쉰이 되는 동생이나 칠순 넘기신 누님이 같이 머리가 하얘지고 보니, 집안의 어린 조카들한테는 같이 어른 대접을 받는다.

어느 날. 논에 모를 내기 위해서 모판을 건져서 논두렁에 죽 늘어놨는데, 그날 누님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나를 가리켜 동생이라고 자랑을 했던 누님이었다. 지난해 인천에서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그 결혼식에 누님과 매부가 같이 오셨다. 옛날 잔치 집에서는 집안의 어른들은 잔치가 끝날 때까지 어른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며 대접을 받았지만, 요즈음 잔치에서는 노인네들은 한낱 퇴물취급 받는 것이 예사가 아닌가.

조카 결혼식이라고 한복에 예의 갖춰 차리고 나왔지만, 옛날처럼 아랫목 같은 자리가 어인 말인가.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는 노인네들이 안쓰러워서 월곶면 용강리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누님이 사는 마을이 접경지역이라 외부사람 출입이 용이하지가 않았다. 누님이 차에서 내리더니 초병한테 내 동생이라고 인사하라고 하지 않는가. 초병이 나를 어떻게 안다고 인사를 하겠는가. 출입시키는 것만 해도 고마울 판인데 말이다. 누님의 말을 들은 초병은 총을 든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고, 나도 얼결에 손을 이마에 올려붙이고 허리를 굽히는 영 이상한 인사를 하고 말았다.

마을은 조용하기 그지없었고, 주위 텃밭에서 일하는 노인네들만 눈에 띄었다. 한복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걷는 누님의 발걸음이 인천에서와는 달리 힘이 실렸다. 감자밭 북돋우는 영감님 불러서 내 동생이라고 말하니, 영감님이 일하다 말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나무 밑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두 분의 노인네들한테도 내 동생인데 김포에서 농사를 무척 많이 짓는다고 누님 딴에는 자랑 섞인 소개를 했다. 그분들이 예의를 갖춘 인사를 하려 하면 얼른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고 인사를 한 것이, 도합 여덟 번은 한 것 같았다. 동네의 사람이 적었길 다행이지, 사람들이라도 많았으면 시장통에서 국회의원 출마자가 유권자들한테 인사하듯이 할 뻔했다. 누님을 모셔다 드리려고 왔는데, 마치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사람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돌아오기 위해 길가로 나오니, 말을 하지 않아도 들어올 때 인사를 나누던 노인네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서 길가까지 나와서 안녕히 가라며 인사를 해서 나도 답례로 정중히 인사를 하느라고 짧은 시간이나마 지체를 했다. 감자밭 북돋우는 영감님이 호미자루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서 얼른 차를 세우고 내가 먼저 안녕히 계시라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초소까지 동승하고 나오신 누님이 초병 옆에서 조심히 가라며 당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저렇게도 좋아하시는 것을 멀지도 않은 가까운 곳에서 왜 그리 못 와봤던가. 내 이제는 자주 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 후로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고 누님의 부음을 접한 것이다.

밤길을 달려서 누님의 영정 앞에서 죄스러운 마음에 용서를 빌었다. 돌아가서야 찾아뵙는 이 동생을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누님은 조용히 가셨고, 동네는 내가 누님과 같이 왔을 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내가 누님을 모시고 왔을 때 인사를 나눴을 법한 노인네들의 얘깃소리만 깊은 밤에 간간이 들렸고, 초상집의 분위기를 살리려 했는지 우리 집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앞 논에서 들려왔다.

“어여, 너 없어도 장례 치룰 수 있으니 바쁜데 가서 모부터 내”라는 소리에 마루 구석에서 졸고 있던 눈이 떠졌다. 누님께서는 내가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했는데, 누님이 자랑하시던 논에서 이앙기로 모를 내면서 문수산 자락을 쳐다봤다. 아마 지금쯤 누님은 보리 익는 냄새를 맡으며 포내리 산을 오르겠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도 참석 못했다. 먼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동생! 동생! 하면서 마치 누님이 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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