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기고] 대형사고
상태바
[기고] 대형사고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6.15 1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결혼생활 이십 년이 되어 가는데 그만한 눈치쯤이야 없겠는가. 아내가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만 보고도 아내의 심기를 헤아릴 수가 있다. 예민할라치면 아내가 내쉬는 숨소리만 들어도 아내의 기분 지수를 헤아릴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마음이 삼한사온같이 변덕이 심한 것은 아니다.

애들이 방학 동안이라 늦게 일어나서 본 천기도에 비유할 수 있는 우리 집의 천기도 역을 하는 아내의 면(面)기도를 보니 습도를 유지한 구름이 끼었다. 이러한 날은 그저 몸 사리는 것이 우선이다. 저 습기 품은 구름이 대체 어디서 발원하여 아내의 얼굴을 흐리게 한 것인지 그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원인을 알아야 기상통보관이 텔레비전의 일기예보 시간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통보하고 주의사항 알리듯이, 우리 애들한테도 알려주어 조심하라고 당부할 텐데 막막하기 그지없다. 점심때가 될 때까지 그 놈의 저기압이 동지나 해상에서 올라온 것인지, 시베리아 기단에서 형성되어 남하하는 대륙성 저기압인지 모르겠다.

한나절만 참으면 해가 진다. 어영부영 한나절 넘기고 저녁때 쓰러지면 내일이다 싶었는데, 동네 형님이 점심이나 하자고 불렀다. 점심에 반주까지 곁들려서 잘 먹었다. 마을 청장년회에서 명절맞이 척사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수고한 몇몇 사람들에게 저녁 대접이 있었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익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았다가 집에 도착했다.

아내의 얼굴에 낀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시간 흐름으로 봐서 바람이 불어와 구름이 씻기어서 맑았을 법도 한데, 아내의 얼굴에서는 전혀 그러한 기미가 없었다. 평소에 분위기 맞추느라고 살랑대던 아들 녀석이 바람구실을 못한 것 같았다.

분위기 이러한데 술 냄새를 풍길 수도 없어서 늦은 밤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곁 눈길로 아내의 얼굴을 힐끗 보니 다른 때 같았으면 잠이 들었을 시간인데, 지금의 얼굴을 보니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을 상이다. 오히려 내가 하품이 난다. 잠이나 자야겠다며 잘 채비를 하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이 넌지시 다가와 묻는다. “모르고 계셨어요? 오늘이 엄마 생신예요.”

오늘이 엄마 생신? 경악할 노릇이다. 벗어놨던 옷을 급히 입고 벌떡 일어났다. 아뿔사! 안되려고 하니깐 돈이 없다. 애들 다그쳐서 명절 때 세뱃돈 받은 것을 높은 이자를 지불하기로 하고 꾸었다. 워낙 급하니까 몇 부 이자로 놓을 것인지 흥정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 열한시 십분, 이 시각에 어디 가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24시 편의점이 있기는 한데 과연 이름값처럼 나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갔다.

차바퀴는 땅하고 마찰도 없이 그야말로 하늘에 떠서 가까이에 있는 대형 할인매장으로 갔다. 제과점 코너의 사람들은 퇴근을 했지만, 케이크 몇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누구에게라도 빼앗길 것 같아 한 덩어리 낚아채는 동안 딸은 벌써 쇼핑카트에 알맞을 정도의 물건을 구입해 실어 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쇼핑을 마치고, 무너지는 삼풍백화점에서 뛰어나오듯 하여 집으로 내달렸다.

열한시 사십분. 아들 녀석은 벌써 상 펴놓고 수저와 그릇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가정이 탄생된 이래로 이렇게 손발 맞아보기는 처음이다. 애들은 싫다고 하는 데 엄마를 끌어다 앉혀놓고 엄마의 생신을 축하한다며 어서 촛불을 끄라고 성화다. 집안에는 이미 환한 전등불을 꺼버리고 영롱한 촛불만 하늘거렸다.

마지못한 듯 아내가 촛불을 끔과 동시에 폭죽이 터지며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클리프 리챠드가 큰소리로 ‘Congratulations’를 불러댔다. 이때의 시각이 열한시 오십분. 한 번의 리허설도 없었는데 소품, 음향, 조명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짧은 순간에 이뤄졌다. 검붉은 포도주를 들이키는데 머리가 핑 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낮과 저녁으로 술을 들이 킨 것이 생각났다. 무의식중에 음주운전을 한 것이다. 음주운전? 큰일 날 뻔 했다. 아니다! 더 큰일이 날 뻔 했다. 마누라의 생일을 잊고 넘어가는 것처럼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대형사고 날 뻔했다. 애들의 귀띔으로 오늘을 이십분 남겨놓고서 부실공사이기는 하지만 겨우 대형사고는 막았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