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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농사는 아무나 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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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농사는 아무나 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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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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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내 고향 유재철 선배님은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물을 때 ‘농사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십여 년이 지난 현재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본의가 아니긴 해도 장래희망이 이뤄지기는 했다. 선배님은 벼농사만 사십여 년을 했는데 생활이 계속 어려워졌다. 다른 걸 해볼 생각도 했지만 풀빵 장사할 주변머리조차 없다며 요새는 돈 많이 버는 작물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웃 마을 정국이가 부추를 심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배님은 ‘영양부추’를 심었다. 집 뒤의 밭에는 개인택시를 운행하는 수국이 아저씨는 ‘배추’를 심었다. 작년 배추 한 포기 값이 사천 원 이상 올랐기 때문이란다. 교회에 다니는 미국이 장로님은 ‘고추’를 심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후배 삼국이는 상추에서 ‘오이’로 작목을 전환했다.

어느 날부터 선배님이 심어 놓은 영양부추에 잎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매립한 땅이라 부추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는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심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름은 ‘영양부추’인데 영양이 제대로 공급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은 수확을 못하고 모조리 베어 버렸다.

화학비료를 멀리하고 퇴비로 대체한다며 돼지 똥을 잔뜩 깔고 배추를 심었던 개인택시 수국이 아저씨는 과다한 영양 공급으로 배추속이 거의 다 타버렸다. 천여 포기의 배추를 폐기 처분하다시피 했다.

교회 다니는 미국이 장로님은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고 농약 대신 EM(Effective Microorganism;유용미생물)이라는 것을 사다가 연신 뿌려댔다. 고춧대가 우악스러울 만큼 크게 자라더니 고추가 탐스럽게 달렸다.

후배 삼국이네 오이는 아래 잎부터 작은 반점이 생기더니 오이 열매까지 시들시들해지는 노균병에 걸려 진딧물만 번지는 농사를 지었다. 다들 울상이 되었는데 교회 다니는 미국이 장로님만 득의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국이 장로님이 고추를 심은 이유는 무슨 특별한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이름 때문이라고 한다. 부추, 배추, 고추 모두 ‘추’자가 들어가지만 고추의 ‘고’는 아마도 높을 고(高)자일 것 같아 상위 작목으로 생각하고 심었다고 한다. 그러던 미국이 장로님네 고추도 어느 날 비 온 후 고추나무에 탄저병이 번져 거의 다 떨어져 별로 수확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고추의 추자가 추락할 추(墜)자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부추, 배추, 고추 모두 떨어진 것이 아닐까?

상추 농사를 짓던 후배 삼국이는 이런 이유로 오이를 심고 내심 안도했는데 그 역시 망했다. 오이 농사도 망했는데 더 속 쓰린 소식은 상추가 품귀현상을 빚어 상추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상추로 삼겹살을 싸는 것이 아니라 삼겹살로 상추를 싸서 먹어야 한다는 농담까지 들렸다. 남들은 부추, 배추, 고추 심어서 손해 봤다고 속이 상했지만 삼국이는 안심은 상추 생각에 속이 더 아프다.

선배님은 부추를 심어서 생긴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비닐하우스에다 달래를 심기로 했다. 달래 종자를 비싼 돈을 들여 구입을 하는 데 파는 사람으로부터 판매시기를 잘 맞추라는 말을 들었다. 설 명절에서 정월 대보름 사이는 명절 음식 때문에 채소 판매가 안 되는 때이니 그 시기만큼은 피해서 출하하라고 했다. 달래 농사를 처음 짓는 선배님은 어떻게 하다 보니 하필 출하시기를 피하라고 한 설 명절 전후가 됐다. 달래의 성질과 특성, 성장 속도를 모르는 채로 키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달래 판매 값이 최저 선에서 형성되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출하를 해야만 했다. 부추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달래를 심었는데, 그 달래마저도 마음을 달래 놓지를 못했다.

내 고향 김포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예전에는 뭔가 하는 일이 잘 안되면 ‘농사나 짓지’, 이런 말을 많이 했다. 농사경력이 오십여 년이 넘는 선배님이 짓는 농사도 이 정도인데, 직장생활에 지치거나 도시 생활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걸핏하면 때려치우고 농사나 짓겠다고 한다. 농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농사는 준비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귀한 일이다. 귀농․귀촌은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철저한 연구와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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