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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7] 3.1절에 윤동주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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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7] 3.1절에 윤동주를 만나다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6.03.02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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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동주’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절망과 고뇌, 그리고 분노와 희망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함께 절망하고 고뇌하고, 그리고 분노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1917-1945)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의 일부분이다. 쉽게 씌일리 없는 시를 쓰면서, 그 시를 쓰는 것이 부끄럽다는 시인의 절망 앞에서 난 부끄러워해야 했다.

지난 1일 불던 색소폰을 접고 집을 나서 영화 ‘동주’를 보았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젊은이의 절망과 고뇌가 무겁게 다가오는 영화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시인은 끝내 그 시대의 아침을 보지 못했다. ‘어둠을 내몰고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일제에 의해 불온한 사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별 헤는 밤)’를 그리워하던 시인은 낯선 이국의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28의 젊음을 마감했다. 감옥 창틀밖으로 빛나던 그 별들은 그의 어린 시절 간도에서 보았던 별이었을 테고, 어머니의 눈빛 이었을 테다.

극장을 나서는데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 시대...’하는 홍보 전단지의 단어 하나 하나가 시퍼런 칼이되어 가슴을 후볐다.

오버랩되는 필자의 젊은 시절은 사치스러움이었다. 필자가 겪어야 했던 유신시대는 일제 순사와 고등계 형사의 눈을 피해 모국어마저 감춰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말이다.

유신의 긴급조치가 겨울날 찬바람처럼 옷깃을 파고들던 시절이었지만 내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았고 우리말을 사용해도 죄가 되지는 않았음이 이제야 행운임을 안다.

영화를 보았던 날이 우연히 3.1절과 겹쳐 영화의 잔영은 오래갔다. 온 종일 국가와 민족은 무엇이며 그 속의 나는 또 어떤 인간 인가하는 생각에 빠져 술잔을 기울이며허우적거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 중의 하나인 윤동주의 ‘서시’를 필자도 좌우명처럼 외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신앙서의 기도문 같은 ‘서시’의 경건함이 이제는 감당키 버겁다. 순수의 상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였을까,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은 차마 외우지 못했다고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감당키 어려워서였다고 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순수하고 여린 감성의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라고 슬퍼한다.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해야 했던 청년 ‘동주’의 시대적 아픔이다. ‘동주’는 부끄러워 했다. 총 대신 펜을 들고 있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동주’에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정지용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게 부끄러움이다”라고 위로 했지만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절망했다.

취조 심문서에 서명하라는 일제 형사에게 “이 시대에 시를 쓰겠다. 시인이 되어 보겠다한 나를 부끄럽게 여기기에 서명할 수 없다”는 독백같은 대사가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동주’가 아니라 그의 부끄러움 앞에 소리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가슴들이다.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동주’의 아픔은 현재의 청춘들에게도 울림으로 다가선다. “28세에 삶을 마감한 신념 가득했던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가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식지 않는 청춘으로 가슴에 남아 있길 바라고,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갔는지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큰 가치를 얻길 바란다.”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말이다.

다행히 ‘동주’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절망과 고뇌, 그리고 분노와 희망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함께 절망하고 고뇌하고, 그리고 분노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영화에 얼마나 몰입했던지 영화 관람을 마치고도 흑백영화인줄 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도 흑백영화가 맞는가 하며, 순간 순간의 장면을 떠올려 보지만 잘 모르겠다. 엔딩 크레디트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뜨겁게 사랑했던 민족과 모국어가 무엇인가 느껴보고 싶다면 ‘동주’관람을 권한다. 모국어로 쓰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은 물론, 모국어로 다투는 것마저 그 시절엔 희망이었으니 말이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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