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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우연히’와 ‘우연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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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우연히’와 ‘우연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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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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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론인·슬기나무언어원 원장

정부 국어당국이 보증하는 이 말의 황당한 모순 

‘우연찮게 길에서 친구를 만났다.’는 문장을 떠올려보자. (내가) 친구를 만났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 아니었을까? 

‘친구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만나려고 미리 마음먹었거나 어떤 필연의, 미리 정해진 (운명적) 만남이었을까? 약간의 비장함마저 감도는 말이구려.

‘우연하지 않게’를 줄인 ‘우연찮게’가 그런 여러 가지의 혼동을 빚는다면, 또 ‘우연히, 우연하게’는 그 ‘우연찮게’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연(偶然)’이란 좀 헷갈리는 말, 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경우를 이르는 언어여서 역할이 꽤 크다. 영어로 보자면 ‘우연한 만남’은 happen to meet(해펀 투 미트) 쯤과 흡사하다. 상대어(相對語)로는 ‘필연(必然)’을 세울 수 있겠다. 

대충 감(感)이 잡히시는가. 허나 사전을 보면 또 그 정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장막 속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다.

* 우연(偶然)-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 우연히-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게

必然(필연)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이다. 이와 비교한 후, 이제는 ‘우연찮게’의 뜻을 그 사전에서 찾아보자.

* 우연찮게-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게

이것은 말인가, 장난인가. 저 말은 우연이 아니면, 필연적 운명에 의한 것이거나 고의(故意) 즉 일부러 했다는 뜻이다. 즉 ‘우연도 아니고, 우연이 아닌 것도 아니고’라는 해석이다.

이런 영향인지, ‘우연찮게’는 사실상 ‘우연하게’와 같은 뜻으로 우리 언중(言衆)들 사이에서 두루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대되는 두 말의 뜻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술(魔術)’을 언어당국인 국립국어원이 ‘표준’ 사전을 통해 구사하는 것일세. 문학적인가, 개그잔치인가, 새로운 차원의 언어인가...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쓴다고 해서 명백히 틀린 저 표현을 용납(容納)해버린 것이다. 더해서 황당한 언어로 그런 태도를 설명까지 한다.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외줄타기를 본다. ‘짜장면’ 말고 오래 ‘자장면’만 옳다 했던 기개(氣槪)는 어디 갔을까? 뭘 하는 국어원인가.

‘우연과 필연’은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이런 말을 쓰자.’는 사회적 약속이 빚은 말이다. (사회)과학에서 주로 쓰는 ‘조작적 정의’의 언어인 것이다. 

실은 서양(학문)의 저런 개념을 먼저 받아들여 ‘偶然과 必然’으로 번역한 일본의 ‘작업’ 결과를 개화기에 중국과 우리가 빌려온 말이다. 일본식 (한자어) 우리말인 것이다.

‘그렇다’는 뜻 然에다 배우자(配偶者) 또는 허수아비란 뜻의 짝 偶를 붙인 것을 우리 지금 쓰는 ‘우연’의 뜻으로 쓰자고 (일본이 제안)하여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또 必然의 必은 ‘반드시’라는 뜻이다.

바야흐로 인류는 인공지능(AI)이 막을 여는 역사적 시점에 서 있다. 곧 이 친구(AI)가 한국어의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 ‘우연’ 같은 주제의 이런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을까? 

내막(內幕)이나 속뜻을 모르면, 하릴없이 끌려갈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우리 지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론인·슬기나무언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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