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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들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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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들이 자랑스럽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6.11.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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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 주역은 최고 국립교육기관 성균관의 유생이었다.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이단을 비판하는 것이 주된 소재였다. 유생들은 현안이 생기면 요즘의 학생회와 비슷한 ‘재회’라는 것을 열어 논의했고, 과반수가 안건에 동의하면 행동으로 옮겼다. 대표자가 글을 짓고 모든 유생들이 서명했다. 그런 뒤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궁궐까지 길을 청소하게 하고 상가를 철수시킨 뒤 글을 들고 조정으로 향했다.
대궐 앞에 열 지어 앉아 임금의 답변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임금이 청을 거절하면 수업 거부와 단식투쟁에 나섰다. 집단 휴학인 셈이다. 세종이 궐 안에 절을 세우자 유생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는 96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100만 촛불 속의 가족 모습과 교복 차림의 중고생, 젊은 연인, 휠체어 탄 장애인, ‘혼참러’(나홀로 시위 참여자)들이 그걸 보여 주지 않았는가. 똑똑한 시민들의 당당하면서도 질서 있는 분노의 외침, 그런 우리 ‘촛불’들이 자랑스럽다.
왕조시대는 임금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후대로 가면 갈수록 임금들이 멍청이가 된다. 나라 안에서 최고 뛰어난 학자들을 뽑아 정성을 들여 교육을 하는데도 왜 그럴까? 왕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책에서만 지식을 배울 뿐,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그러니 어떤 문제를 만나면 대처할 줄을 모른다. 현실문제에 대처하는 능력은 거의 바보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상태인데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지극히 중요하고 어려운 현안을 책임지고 처리해야 하니,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때 기댈 사람을 찾는다. 대개 주변에 있는 환관(宦官)에게 물어서 처리한다. 환관의 힘이 대신보다 셀 수밖에 없다.대통령의 자녀들도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고 어떤 일을 처리해 본 적도 없다.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이미지 관리를 잘 했던지, 여당 사람들이 잘 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되고 대통령에까지 당선됐다. 청와대에 살아서 세상 경험이 없겠지만, 뭔가 능력이 있고 소신이 있는 줄 알았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진정으로 이야기 상대가 되고 충고를 해 줄 사람이 없었다.그때 나타난 이가 최순실씨다. 젊은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던 여자다. 박 대통령은 최씨를 믿고 모든 일에 자문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 최씨가 정상적으로 잘 한다 해도, 국가 대사를 일개 아녀자에게 물어서 처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최순실씨가 곳곳에서 갑질을 하고 행패를 부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인사에 개입하고 이권을 노리는 등 온갖 나쁜 일을 해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 놓았다.
고종 19년(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난을 피해 민비는 변장을 하고 궁을 탈출,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녀가 찾아왔다. 무녀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중전이 이곳에 피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민비는 물었다. “언제쯤 환궁할 수 있느냐”고. 환궁하고 싶은 마음뿐인 민비에게 그 무녀는 환궁일자를 점쳐주었다. 훗날 환궁일자는 기가 막히게 정확했다. 민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겨 그 여자를 데리고 환궁했다. 몸이 아파도 그녀가 한번 쓰다듬어주면 금방 낫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민비의 총애는 나날이 더해갔다. 민비는 너무나 고마운 그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에 봉했고  무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신당까지 만들어 주면서 진령군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진령군은 아무 때나 대궐을 들락거리면서 임금과 민비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진령군이라는 무녀에게 달려들어 아부하거나 뒷돈을 주면서 엽관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김창열이라는 그녀의 아들은 신분이 천민이면서도 벼슬아치보다도 더한 위세를 떨었다.
이런 현상을 보다 못한 전 정언 안효제는 참을 수 없는 심정으로 무녀 진령군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승정원의 승지로 있는 민영주와 박시순이 이 상소문을 받아보고 임금에게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했다. 민영주는 “이처럼 흉악한 상소를 어찌 주상께 올릴 수 있겠소?”하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박시순은 “이것은 언관이 한 일인데 어찌 올리지 않는단 말이요!”하고 말했다. 옆에서 정인학이 말했다. “도승지와 의논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도승지 김명규 또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이 상소문을 정권의 실세인 민영준에게 내보이면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민영준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그런 권한은 도승지에게 있는데 도승지가 결정하지 못하니 세상에 도도승지가 또 있단 말이요?” 정권실세의 노기 띈 목소리에 기가 질려서인가! 도승지인 김명규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 역량으로는 올릴 수가 없소”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안효제는 추자도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무녀에 대한 상소가 끝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상소가 잇따른 것이다. 전 형조참의 지석영의 상소 또한 절절한 마음으로 올렸다. “요사스러운 여인인 진령군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뜯어먹고 싶어하는 자입니다. 그의 죄는 따져 묻지 않은 채 마치 사랑하는 사람 보호하듯이 하시니 백성의 원통함을 무엇으로 풀 수 있겠습니까?
무녀 진령군에 대한 치죄는 갑오개혁안에서조차 엿보인다. “김창렬의 어미 '진령군'은 신령을 핑계대고 위복(威福)을 조종했고 민형식은 세 도(道)를 관할하면서 그 해악을 만민에게 끼쳤다.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함에도 그러지 못해 여론이 끓어오르니 모두 형률을 적용해 신과 인간의 분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 무녀의 술수와 민씨정권 인사들의 적폐가 얼마나 심했으면 개혁과제로까지 등장하였을까?
그러나 진령군과 민씨들의 국정 전횡도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그 종말을 고했다. 이 모든 기록은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깨비 나라”에서의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던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허경진역)에 수록되어 있다. 매천은 자신이 보았던 시대 권력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과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는 어떤 맥락에서 차이가 있는지 참고해 보라고 이 기록을 남겨 놓았음이 분명하다.
지금 최순실씨는 꼭 진령군과 같다. 그러나 그때는 진령군의 목을 베라는 안효제 선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 주변에서 최씨를 처벌하라고 건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최씨만 대통령의 눈을 흐리게 하고 귀를 혼란하게 한 것이 아니라, 장관이나 비서들도 같이 동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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