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데스크칼럼-영화는 영화로 보면 된다
상태바
데스크칼럼-영화는 영화로 보면 된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태백담당>
  • 승인 2014.02.06 0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변호인의 흥행 요소에 관해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안녕하지 못한’ 이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적절히 반영했다는 주장 등 여러 분석이 있다. 국가란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짓밟은 정권과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이야기는 비단 어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충분히 시의성이 있다. 영화 ‘변호인’의 영문 타이틀은 ‘The Attorney’다. 변호사란 이름으로 쓰이는 또 다른 영어로는 ‘애드보킷(Advocate)’이 있다. 옹호자, 지지자, 변호인이란 뜻이다. 법정 드라마와 영화가 많은 미국에서는 종종 이 타이틀이 붙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1997년에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가 출연한 ‘데블스 애드보킷’(Devil’s Advocate·악마의 변호인)이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을 보게 된 필자는 좀 다른 데 있다. 어느 조간신문에서 영화 ‘변호인’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싸잡아 비난하는 하단 광고를 보고 난후였다. 보수 단체의 하단 광고의 제목은 ‘영화 ‘변호인’은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이며 부제는 ‘부림 사건과 노무현은 과연 절대 선인가?’다. 다른 하나는 조갑제의 ‘긴급 출판! 악마의 변호인’(delvil’s advocate)이며, 부제는 ‘부림 사건의 변호인은 왜 악마 김정일의 변호인이 되었나?’였다. 둘 다 주인공 변호인 고 노무현을 비난하는 광고다. 이 광고처럼 이 영화는 정말 의혹과 왜곡이 많은 잘못된 영화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실패한 노대통령’을 변명하기 위한 영화도 대선용 선동 영화도 아닌 노무현이라는 실존 인물을 픽션화한 재미있는 영화일 뿐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80년대 신군부 독재 시절 돈만 벌려는 어느 속물 변호사가 대학생의 보안법 위반 사건 변론을 계기로 민권 변화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조갑제가 광고에서 인용한 ‘노무현이 변론한 것은 공산주의’이고 ‘노무현 미화 보다는 국가 부정에 방점을 찍은 영화’와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이 나라 민주화의 기폭제가 된 1987년 민중 항쟁의 뒤안길을 어느 변호사의 고뇌의 삶을 통해 회상하도록 한 영화일 뿐이다. 물론 이 영화는 부림 사건 무죄를 선고하고 지금은 후회한다는 어느 변호사가 광고에서 주장했듯이 ‘부림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을 절대 선’으로 유도한 측면은 부정할 수는 없다. 나아가 이 영화가 다소의 과장된 측면도 있고 당시 부림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엄격한 논증이 필요한 논문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할 영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상의 다소의 과장이나 흥미 유발을 진실성 유무라는 잣대로만 따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는 마치 ‘안중근 의사’라는 영화에서 그의 의인적인 행적을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하게 엮어가는 장면을 문제 삼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영화 ‘변호인’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 영화가 재미있고 관객들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사라진지 오래인 우리 사회에서 상고 출신의 고학생이 고시 합격으로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했을 지도 모른다. 변호인의 고시 합격전의 가난에 찌든 모습, 국밥집 밥값도 지불치 못하는 처량한 신세, 집안 천장의 쥐 소동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서민의 삶, 모두가 가난을 체험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슬픈 장면들이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국가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구속된 단골 식당 주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용기 있는 변론은 관객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을 비쳐줬다. 이 영화는 부림동 사건을 배경으로 공권력에 짓 밟힌 자와 가난한자를 위해 용기 있는 변호인의 당당한 모습에 매료됐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비판 광고에서 말하는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잣대로 이 영화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영화는 영화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죽은 변호인은 오늘도 말이 없는데 그를 또다시 좌파 용공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이다. 더욱이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작고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이 아니라 단지 영화 자체가 가진 스토리와 연기에 관객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주인공 역을 맡은 변호인 송강호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력에 모두 매료됐기 때문이다. 한편의 영화가 천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변호인’의 1000만 관객 중에는 비명(非命)에 간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애틋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로 보면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