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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투-형사들의 겨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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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투-형사들의 겨울이야기
  • 이영길 <강원 삼척경찰서 수사과장>
  • 승인 2014.02.26 0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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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흰색의 겨울옷을 입었다.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건만 어쩌자고 겨울은 저리도 하얗게 눌러 앉아 버린 것 일까. 고성에서 삼척으로 발령받아 오던 날 나는 단단히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하늘은 마치 수십 년의 한을 한꺼번에 쏟아놓는 듯 했다. 계속해서 내리는 눈은 마을과 마을을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분리 되어진 곳에서 사람들은 점점 고립돼 갔다. 내가 속한 삼척경찰서도 민생의 안전을 우선으로 일단은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고립된 마을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삼척시는 시내에서 조그만 벗어나도 시골농가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는 산촌이며 어촌이고 농촌이었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많은 가구가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이 상당수다. 형사들은 업무 틈틈이 시간을 내어 홀몸 어르신들을 우선해 땔감용 장작을 쪼개어 드리기로 했다. 장작을 패다보니 문득 몇 해 전 일이 떠올랐다. 양양군의 시골파출소에 근무할 때다 마을에 유독 다정하게 사시는 70대의 노부부가 있었다. 내가 순찰을 돌때면 꼭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며 따뜻한 차를 먹여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찰을 돌다 보니 어르신께서 손수 도끼질을 하며 장작을 쪼개고 계셨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어르신께 도끼를 달라고 해 한참동안 장작을 패다 돌아왔다. 그 후로는 어르신이 사는 동네로 순찰을 나갈 때면 주인이 있건 없건 들려서 장작을 쪼개어 쌓아두고 나오게 됐다. 하루는 어르신께서 장작을 패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우시더니 입을 벌려 보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어르신은 무언가를 집어 넣어주셨다. 그러곤 꼭꼭 씹으라고 하셨는데 순간 쌉싸름한 향이 내 입속에서 번져 나왔다. 산삼이었다.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가 산삼 몇 뿌리를 캐오셨단다. 어르신은 그 중 한 뿌리를 내 입에 덥석 밀어 넣어 주셨던 것이다. 약초상에 내다 팔았으면 적잖은 돈을 받았을 텐데도 어르신은 장작더미의 품삯으로 선뜻 지불하셨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품삯이었을지도 모를 산삼 한 뿌리. 나는 그렇게 노부부의 사랑을 염치없이 받아먹다가 발령이 나서 훌쩍 마을을 떠났다. 여기저기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장작 패는 소리다.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시키는 강력팀 형사들의 몸놀림에 통나무가 쩍쩍 쪼개진다. 장작 패는 솜씨도 역시 최고다. 그렇게 장작을 쪼개어 차곡차곡 쌓아 드렸더니 한동안은 걱정 없이 따뜻하게 지내시겠다며 어르신들이 무척이나 고마워하신다. 폭설이 준 피해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 힘을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랑이고 또한 희망인 것이다. 형사들의 업무가 바쁘고 시간을 내지 못해 어르신들을 매일 찾아볼 순 없지만 우리 삼척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홀몸어르신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런 형사들의 겨울이야기가 주변에도 맑게 퍼져나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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