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자식 앞에 여야는 없었다
상태바
자식 앞에 여야는 없었다
  • 최재혁기자
  • 승인 2015.08.27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년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40% 초반인 청년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2 수준이다. 직장에 들어가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은 하늘의 별 따기다. 오죽했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을까.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곳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와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다.정권 마다 그렇게 애타게 바꾸고자 했던 사회상(社會相)이었던 만큼 이제 반칙없는 사회가 됐을까?


인사청문회의 단골메뉴이기도 했고, 최근 다시 불거진 지역구 국회의원의 자녀 취업청탁 사례가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요원하다. 취업청탁은 법의 잣대로 재단하기에는 어설프지만, '힘 있는 자'와 '빽 없는 자'를 갈라놓아 계층갈등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측면에서는 매우 중한 일탈행위다.


청년들의 공분이 하늘을 찌른다. 가뜩이나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에 '현대판 음서제(蔭敍制)'를 방불케 하는 특혜 취업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음서제는 부모나 조상을 잘 둔 자손들이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는 제도다. 문벌 귀족사회를 지향했던 고려시대 이후 성행했다.


고려 시대에는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이들의 자녀에게 과거를 통하지 않아도 벼슬을 내리는 음서제(蔭敍制)가 있었다. 부모의 음공(蔭功)에 따라 자손을 벼슬에 서용(敍用)하는 일종의 특혜제도였다. 처음에는 장자(長子)만 혜택을 받았고 직위도 엄격히 제한했지만 제대로 지켜질 리 만무했다. 문벌귀족들이 압력을 넣다 보니 조정에 동생이나 사위·조카에 이르기까지 친인척으로 가득 찼다. 오죽하면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은 유관 업무에 종사할 수 없도록 상피제(相避制)라는 것까지 도입했을까.


요즘에도 부모의 지위가 자녀 취업에 영향을 미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열린 채용이 늘어나고 있다지만 아직도 입사원서에 부모의 직업과 직장명은 물론 직위까지 적게 만드는 곳이 적지 않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은근히 집안 배경을 과시하는 게 불문율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법조계의 길을 걸어왔다거나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세계를 여행하면서 외국어를 습득하며 경험의 폭을 넓혔다고 기술하는 식이다. 한 포털사이트가 조사했더니 구직자의 64.6%가 부모의 지위나 재산 등이 본인 실력보다 취업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이러니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은 엄마의 역할이지만 군대와 취업은 아버지 몫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시중에 나돌 수밖에 없다.


‘현대판 음서제도’ 논란이 한창이다. 국회의원 자녀 두 사람이 로스쿨이라고 불리는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딴 다음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원하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도화선이 됐다. 돌이켜보면 고려시대의 음서제도는 적어도 권력자의 시각에서는 ‘왕조 안보’라는 큰 틀의 당위성이 없지 않았다. 지금의 ‘사이비 음서’는 그저 개인적인 ‘갑질’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취업준비생들이 국회의원 같은 '슈퍼 갑'을 아버지로 둔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말도 들려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돈 없고 빽 없는 아버지'들의 어깨가 축 처질 만한 일이다. 학자들은 고려가 망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음서제를 꼽고 있다. 낙하산 인사도 모자라 현대판 음서제까지 판치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나라 꼴을 보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는 '꽌시'(關係) 문화란 것이 전통적으로 이어져왔다. 꽌시는 우리말로 치면 관계 그 자체다. 학연과 지연과도 일맥 상통하는 꽌시는 중국에서는 법이나 제도 보다 더 중요할 정도로 연줄과 인간 관계의 친밀함에 따라 사업의 성과가 결정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도원결의'의 우아한 전통인 '꽌시'는 우리의 의리나 정(情) 문화와 흡사하다. 하지만 '의형제'의 전통문화는 수천 년 간 중국의 발목을 잡았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를 불러 온 적폐가 됐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꽌시 없이는 일이 성사되기 쉽지 않다. 문제를 풀어야 할 때 꽌시를 찾는 건 일반화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묻지 않고, 그 담당자를 움직일 수 있는 꽌시를 찾는 게 우선이다. 거의 이런 식으로 일 처리가 되는 게 인구 13억 명의 중국 사회다. 중국의 공무원 사회는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


물보다 진한 피의 확고한 혈연으로 묶인 '혈족 꽌시'는 또 하나의 적폐다.꽌시는 한국의 인맥 문화와도 공통점이 많다.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능력을 검증하기 보다는 학연과 지연을 우선 생각하는 우리의 선출 문화가 그렇다.


'현대판 음서제'가 미생(未生)을 울려 놓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의 자녀들이 특혜 취업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회의원 신분인 아버지가 기업과 정부 기관 '꽌시'를 통해 로스쿨을 졸업한 자식의 채용을 갑질했다. 젊은 미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빽 있는 아버지는 자식들을 법조 귀족 만들고, 빽 없는 이들은 미생으로 남아야 하는 반칙사회다.

특권 아버지는 죽어라 노력해도 열리지 않는 미생들의 취업의 문을 '꽌시'로 열어 젖혔다. 자식 앞에 여야는 없었다. 이래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할텐가.요즘같이 청년 고용절벽 문제가 심각한 마당에 일반인의 응시 기회를 박탈하고 일부 특권층에 특혜를 베푸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