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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언택트(un+contact·비대면)한가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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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언택트(un+contact·비대면)한가위 단상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20.09.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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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아들, 딸, 며느리야 이번 추석엔 고향에 안 와도 된당께’ ‘얘들아, 이번 벌초는 아버지가 한다. 너희는 오지 말고 편히 쉬어라잉’ ‘아범아, 추석에 코로나 몰고 오지 말고 용돈만 보내라’ 요즘 전국 거리엔 이런 현수막들이 붙었다. 명절 때마다 듣던 ‘민족대이동’이라는 말은 간데없다. 추석을 앞두고 도내 지자체들이 앞다퉈 고향방문 자제를 당부하고 있다. 안내문자도 보내고 동네방송도 한다. 오지도 가지도 말란다. 집단감염 우려 때문이다.

이번 추석 명절은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해 벌초와 귀성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인지 고심하게 만든다.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최근 직장인 8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복수 응답)에서는 올 추석 연휴에 ‘집콕’(30.8%) 혹은 ‘부모님 댁만 다녀올 것’(28.8%)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중앙 재난안전대책본부는 최근 추석 연휴기간에 “가급적 집에 머물러 달라”고 권고했다. 이래저래 올 추석 명절 풍속도는 예전과 많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많은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섯 밤만 자면 추석이다. 고향에선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차례 준비에 분주하고, 고향길을 찾는 이들은 묵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닦으며 막혔던 시간여행을 떠날 것이다. 어린 시절 추석빔으로 받은 고무신을 신고 껑충거렸던 중년층들이라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로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날 듯하다.

각설하고, 추석이 주는 의미는 한결같다. 추석은 감사하는 시간이다. 가을의 풍요를 가져다 준 자연에 감사하고, 함께 일한 선후배와 동료, 그리고 이웃에 감사하고,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한 조상에 차례를 지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무엇보다 살아 생전에, 설사 이 세상에 없더라도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언제부턴가 조상묘 앞에 서면 내가 죽은 후 자식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그려 본다.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묘를 찾는 횟수가 일 년에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는 나의 행동이 어떻게 비쳤을까. 그러고 보면 추석은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추석은 수확의 계절에 맞는 가장 풍요로운 명절이다. 크다는 ‘한’과 가운데라는 ‘가위’를 합쳐 한가위라고도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에는 추석 때처럼 넉넉하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염원이 담겼다. 온 가족이 모여 조상을 추모하고 친지·이웃과 햇곡식·햇과일을 먹으며 정을 나눈다. 귀성 전쟁을 불사한 민족 대이동은 거역할 수 없는 원초적 이끌림에서 비롯한다.

추석은 또 배려와 나눔의 시간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살아 오면서도 조금 더 나은 이웃이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문화가 있었다. 선조들이 비단옷을 입고도 나들이할 때는 두루마기를 걸쳤다든가, 고기를 구울 때 문을 닫은 것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한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누어 먹었다고 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도 생겼다.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다. 제비 다리를 고쳐준 대가로 일확천금을 얻은 흥부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망각한 채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생각을 못 했다는 점일 것이다. 1년 중 8월의 보름달빛이 가장 밝다고 한다. 올해도 빈부 차로 추석 모습이 양극화란 말이 심심찮게 들렸다. 하지만 달빛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은잔에 비치든 사발잔에 비치든 보름달의 본디 모습이 어찌 다르겠는가.

“과거는 언제나 행복이요, 고향은 어디나 낙원이다. 해관(海關) 시계가 자정을 알려도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사람은 없었다.”(황포탄의 추석) 늦은 밤 타국의 공원에서 추석을 보내야 했던 식민지 청년 피천득은 고향에서 아름다웠던 기억을 반추하며 향수를 달랬다. 고향의 정을 알기에 타관서 맞는 명절은 더욱더 애잔하다.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고향은 큰 위안이다.

찾아갈 고향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한데 올해 추석은 ‘언택트(un+contact·비대면) 한가위’란 사상 초유의 명절 풍경을 예고한다. 벌초도 대행 서비스가 급증하고, 온라인 성묘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이동 제한을 권고하고 있다.

객지로 흩어진 자식은 그나마 명절이 되어야 고향에 모일 수 있는 시대다. 부모와 친지의 안부를 확인하고 가족애를 돈독히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 창궐은 소소한 행복마저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종일 울었네/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서정주) 언제쯤 그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갈지 기약조차 없어 더 힘든 시간이다.

조선시대에도 역병이 돌거나 특수한 사정이 있을 땐 추석 차례를 건너뛰었다. 그래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명절에 온가족이 모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조상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는 자손들 건강 아닐까.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말마따나 “코로나 시대에 연대하는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흩어지는 것”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민족 최대의 시험대’가 됐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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