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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수원은 정조가 세운 첨단 농업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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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수원은 정조가 세운 첨단 농업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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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2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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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수원은 농사짓는 물이 풍부해 이름도 수원(水原)이다. 황구지천(黃口池川)·서호천(西湖川)·원천천(遠川川) 등 소하천 주변이 기름진 충적평야로 형성돼 있다. 이런 이유로 농업이 발달했다. 수원과 농업의 역사는 꽤 오래전부터다. 서둔동의 여기산(麗妓山) 주변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에 좋은 땅으로 벼농사를 지어 왔던 곳이다.

청동기(BC2,000~1,500년경)~원삼국시대(AD300년경)의 토기, 철촉, 방추차, 온돌 구조 및 집터가 발굴되기도 했는데 바닥에 볍씨자국이 있는 토기 편과 목탄화 된 쌀, 화덕시설에서 볏짚의 사용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우리 농업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오랜 농업의 역사도 간직한 수원은 정조(正祖;재위1776~1800년)가 화성(華城)을 쌓으면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정조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현대식 농업용 저수지를 수원에 건설했다. 농업문제의 핵심을 물 문제 해결이라 본 정조는 관개시설 확충과 둔전(屯田)개발에 힘을 쏟았다.

1795년(정조19년) 정조는 수원시 송죽동에 만석거(萬石渠;일왕저수지)를 축조했다. 만석거에는 최신의 수문과 수갑을 설치했으며, 이곳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는 대규모 국영농장인 대유둔(大有屯)이 조성됐다. 1799년(정조23년)에는 서둔동에 축만제(祝萬堤;서호저수지)가 설치됐다.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한 쌀 생산 기반구축으로 조선농업의 혁명을 추진한 정조의 뜻이었다.

수원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시장(牛市場)이 있었다. 정조가 화성을 지을 당시 수레를 끄는 소가 688마리, 말 252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화성축성이 완료되자 정조는 688마리의 소를 지역 농민에게 배분하고, 또 일부는 둔전에 이용했다. 정조의 이런 정책이 세월이 지나 매향동에 우시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1918년 일제 총독부조사에 따르면 수원 우시장에서 한 해 거래된 소가 2만여 마리에 달하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수원 왕갈비가 지금도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수원은 대추, 밤, 배의 집단 재배지이기도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제자(思悼世子)의 묘인 융릉(隆陵)에 제를 올리고 남은 과일 종자를 수원의 조원동(棗園洞), 율전동(栗田洞), 이목동(梨木洞) 등지에 심었다. 조원동의 조(棗)는 대추나무 조이다. 대추나무 숲속에 그림같이 들어선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율전동의 율(栗)은 밤나무 율이다. 밤나무 밭이 많아 밤 밭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목동의 이(梨)는 배나무 이다.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 골이라고 하였다. 수원에는 얼마 전까지 배와 사과 등을 연구하는 원예연구소가 있었다.

수원은 1960~1980년대 우리나라 관광농업의 랜드마크였다. 추억의 딸기밭과 포도밭의 내음을 간직한 서둔동의 푸른지대와 이목동의 노송지대(老松地帶)가 최고의 농업관광테마였다. ‘푸른지대’는 옛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후문일대에 넓게 펼쳐져 있던 딸기밭을 말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수원 푸른지대 딸기는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곧 ‘나들이’이는 푸른지대에서 딸기를 먹는 것이 유일할 정도였다.

‘노송지대’는 봄이면 딸기, 가을이면 포도를 먹으러오는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힐 정도였다. 1966년 노송지대 딸기와 포도를 먹으려고 찾아온 관광객이 15만 명이였다고 한다. 이때 수원시 전체인구가 12만 명 정도였으니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이 지역은 1790년경 정조에 의해 조성된 곳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뜻이 통했을까. 정조 이후에도 수원은 근대 우리 농업 발전을 이끈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농촌진흥청,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비롯한 농업관련기관이 밀집하면서 대한민국의 농업혁명과 발전을 이끌었다.

정조가 농업에 관한 첨단 실험을 하던 수원의 축만제(서호), 만석거(일왕), 원천, 광교 농업용 저수지는 현재 수원 시민들을 위한 호수공원으로 변모해 또 다른 쓰임새로 쓰이고 있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던 정조의 뜻이 통했을까. 이 호수들은 이제 시민들을 정신적으로 풍족하게 만드는 소중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호수와 달리 지나친 도시개발과 공해로 노송지대 소나무가 죽어 사라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노송(老松)이 줄줄이 서있는 장관을 후손들도 볼 수 있도록 공공(公共)이 나서 특별한 관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농업을 위해 만들었던 저수지가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노송도 그랬으면 좋겠다.

 

[전국매일신문 전문가 칼럼]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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