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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의 역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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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의 역설이 안타깝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5.11.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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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한 톨이라도 남기거나 버려선 안 된다. 벌 받는다’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은 이제는 틀렸다.우리의 역사요, 문화이다시피 한 쌀을 이제 버려야만 할 지경에 처했다. 밥알 몇 톨을 설거지통에 버리는 게 아니라 수만 톤 또는 수십만 톤의 쌀을 바다에 쏟아버리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한 농촌지역 국회의원은 최근 국회에서 “묵은 쌀을 바다에 수장하는 방법은 어떠냐”고 농림부 장관에게 물었다.
쌀이 권력이고 돈이던 시대, 금쪽 같이 여기던 시대를 부지불식간에 지나 이제는 쌀이 돌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현재 묵은 쌀 재고량은 무려 85만톤이나 된다. 쌀 재고량은 지난 2013년 21만톤이었으나 지난해 풍작을 이루는 바람에 54만톤이나 추가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쌀 재고량이 늘어나는 이유는 WTO 협정에 따른 쌀 의무수입량(40만 8천톤)과 풍년이 계속된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쌀 재고량이 올해 말쯤에는 100만톤이 넘어서게 된다. 대풍의 결과다. ‘풍년의 저주’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쌀값 폭락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정부가 20만톤을 수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농심은 타들어간다. 이 정도 규모로는 쌀 값 하락을 막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농민단체 회원들은 27일 오후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쌀 대책에 항의하며 벼 낱알들을 길바닥에 뿌리기까지 했다.
농민들의 항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쌀 보관 비용이 만만치 않다. 쌀 재고 10만톤을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간 316억원으로 추산된다. 올해 기준으로 쌀 보관 비용만 2686억원에 달하며 2016년엔 3000억원에 육박한다. 쌀 보관 창고가 부족할 정도다.
정부가 사들인 묵은 쌀은 가공용과 주정용, 사회복지용, 해외원조용, 교도소 급식용 등으로 쓰인다. 이런 데 사용하더라도 쌀 소비가 줄면서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벼 가마니는 매년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990년 이후 쌀 재배 면적은 줄고 있으나(년간 1.8%씩) 1인당 쌀 소비량은 2.5%씩 감소했다.
정부가 쌀 관세 유예조건 철회 방침을 세웠더라도 쌀 재고량은 줄어들 가망이 별로 없다. 5~6년 흉년이 들면 모를까… 묵은 쌀 재고량을 줄일 다양한 대책들이 제기된다. “쌀을 바다에 던져버리자”라거나, “해외원조용으로 쓰자”, 또는 “가축 사료용으로 허용하자”라는 등 백가쟁명식 방안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보릿고개는 가난과 배고픔을 상징한다. 과거 햇보리가 나오기 전까지 넘기 어려운 고개를 비유했던 보릿고개는 가을에 수확한 묵은 곡식이 다 떨어졌는데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을 말한다. 쌀밥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는 식량난 해결이었다.
정부는 먹고사는 문제해결을 위해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개발에 전념해 1970년대 중반부터 10a(1000㎡)당 수량이 500㎏가 넘는 통일벼 품종인 밀양 21호, 밀양 23호, 삼강벼 등을 잇달아 개발하는 등 녹색혁명을 이루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소비자들의 쌀 소비 패턴에 맞춰 쌀도 점차 고급화됐다.
하지만 풍년가가 울려퍼져야 할 농촌 들녘에는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쌀 생산량은 증가하는데 쌀 소비량은 크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우리나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78.2g으로 전년보다 5.8g(3.2%) 줄면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제 국민 한 사람이 하루 밥 두 공기도 안 먹는 셈이다.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쌀농사를 줄여야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중국 검역당국과 국산 쌀 수출에 필요한 검역과 위생요건에 최종 합의함으로써 국산쌀의 중국 수출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중국이 세계 최대규모의 시장인 점을 감안하면 이제 중국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쌀 개발에 전력해야 할 때다.쌀과 역사를 함께 해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조상들로부터 욕먹지 않으면서도, 더욱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방안이 무엇일까?
쌀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주식이 되고 우리 농업의 뿌리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하여 쌀의 수요 창출과 쌀 가공산업의 발전은 대단히 중요하다. 벼농사는 우리 농업의 근간이며, 쌀의 소비 확대는 우리 농업이 활성화되어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통일미 120만 톤을 항시 비축하여 통일 이후를 준비하고, 저소득 영세민의 생계에 필요한 쌀을 무상으로 지원하여 진정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도 쌀만이 해낼 수 있는 이 시대의 역할이다.
우리 국민이 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변신하는 쌀을 도와 새로 개발되는 새로운 쌀 가공식품을 적극 애용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위하고 농민을 살리는 길이다.농사를 잘 지어도 마음 놓고 웃지 못하는 농가들의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하지만 민족의 주식인 쌀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농민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슬기로운 방법으로 풍년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언제까지 운에 맡기는 투기형 농사에 한숨지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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