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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쌀이 곧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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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쌀이 곧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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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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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문제열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우리의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단군 이래 반만년 동안 한국인에게 쌀은 하늘이었다. 신주(神主)단지, 부루(扶婁)단지, 제석(帝釋)단지로 부르며 곡식의 신령을 모시는 단지 신앙은 쌀의 숭상에서 비롯됐다. 벼농사와 출산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담겨 있다. 쌀 앞에서는 임금도 예외일 수 없었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오면 임금은 곡기를 끊었고, 기우제를 지내며 자신의 부덕으로 농사가 망했다며 하늘에 빌었다.

우리 민족에게 쌀은 생명을 잇는 삶의 원동력이자 희망이었다.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쌀에서 세시풍속(歲時風俗)이 비롯되었고 쌀농사를 짓기 위해 일상의 모든 삶이 절기에 따라 움직였다. 쌀은 음식 이상의 존재로 한민족의 정신에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세간을 풍자하는 말들도 밥이 주어다. 신세를 지면 밥 한번 먹지, 안부를 물을 때 밥은 먹었느냐, 사람 노릇 못하는 이를 밥통, 죄를 저지르면 콩밥 먹는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놈이라고 나무란다. 

2003년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된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탄화 볍씨는 미국 지오크론 연구소와 마리조나대, 한국지질자원 연구소 등에서 교차 검증한 결과 1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중국 후난성의 11,000년 전 볍씨보다 수천 년 앞선 것이다. 이 밖에도 여주 흔암리의 탄화미가 약 3,000년 전, 김포와 부안, 평양의 대동강, 부여와 김해에서 2,000여 년 전의 탄화미가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쌀의 종주국임에 틀림이 없다. 

농민은 쌀을 자식처럼 키운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을 한자로 쓰면 미(米)가 된다. 이를 풀어보면 八十八로 형성돼 있다. 쌀이 밥상에 오르려면 팔십 팔번의 농부의 손길과 정성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여든여덟 살을 미수(米壽)라고 하는 이유도 쌀을 키우기 위해 각고의 풍상을 겪는 농부의 삶과 쌀이 투영된 것이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도 있다. 쌀알 하나를 만들려면 농부가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쌀알 한 알 한 알이 모두 노력의 산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부자를 일컬어 천석꾼, 만석꾼으로 부르며 부의 단위를 쌀로 재단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2~13년을 제외하면 가뭄에서 자유로운 해가 없었고 그중 태종 15~16년에는 가뭄이 심각한 흉년으로 이어지며 제삿밥을 마련하려다 쌀을 훔친 백성이 옥(獄)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태종은 가뭄으로 인해 백성이 겪는 어려움을 자식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여겼고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세자 충녕대군에게 양위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러던 쌀은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분식 장려와 2000년대 들어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쌀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다. 급기야 우리 밥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쌀 생산은 올해도 내년도 지속되니 걱정이다.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4kg으로, 1990년 119.6kg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쌀값은 폭락으로 이어져 산지 쌀값은 20㎏ 기준 4만원 중반으로, 3년 전보다 20%가량 떨어졌다. 반면 농자재 가격과 비료값 등은 큰 폭 오르며 생산비가 늘었다. 농민들의 고통과 한숨만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남아도는 쌀 때문에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정부는 매년 쌓이고 반복되는 쌀 문제를 ‘시장격리’와 일부 다른 작목 전환 등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근원적 대안을 마련할 때다. 농토를 보전하면서 벼 재배보다 더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지속가능한 농업 구조 정책 전환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1960년대 필리핀은 세계적인 쌀 생산지였다. 쌀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넉넉한 돈 덕분에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농업투자가 소홀해지면서 오늘날 세계 최대 쌀 수입국으로 전락(轉落)했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에게 독립투사로만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농민운동가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농업은 생명 창고라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니며, 이것은 억만년이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전국매일신문]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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