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론(正名論)이라 하면 으레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君)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臣)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父)는 아비다워야...’하는 공자 말씀 들먹이며 충효의 뜻으로 새긴다. 권력이나 인륜의 구조로 ‘바른 이름’ 정명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명론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이름은 사물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름(名)에 따르는 분수(分), 명분이 서로 어긋나선 안 된다. 정명론은 그래서 명분론이기도 하다.
철수 사과 컵 등의 이름(명사) 말고도 가다 오다 크다 쩨쩨하다 따위 상태나 동작을 가리키는 말도 모두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正(정)은 ‘바르다’의 뜻이니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단어다. 정의(正義)는 ‘바른 뜻’으로 이미지가 못내 엄숙하다.
그러나 반전은 있다. 원래 한자의 ‘작가’는 이런 활용 사례를 보고 딱하다 혀를 차거나, 깔깔 웃을지 모른다. 어원론(語源論) 얘기다. 원래 그림으로 빚은 글자이니 화가라고 해야 할까나.
“저 성은 내 것이다.” 외치며 적의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그림이 옛글자 正이다. 나라 국(國)이나 에워쌀 위(圍)에서 보는 테두리 囗(국) 아래에 발걸음 지(止)가 벋대고 선 그림이 원래 글자다. 세월 지나며 한 일(一) 모양으로 바뀐 囗은 성의 벽 또는 담(wall)이다.
모든 군사력의 핵심인 보병(步兵)의 步자 윗부분에도 있는 그칠 지(止) 글자의 바탕은 발(걸음)이다. 걸음은 가다가 멈추기도 한다, 거기서 중지(中止)하다는 뜻이 번져 나왔겠다.
그렇게 하여 이기면(점령하면) 내 것이고, 그 뜻이 정의다. 지면 어떻게 되나. 세상사가 상대적인 걸 드러내는 글자일세. ‘공자 정명론’에서 보듯 그 시대에 이미 正은 정의의 뜻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정의다’ ‘나만 옳다’가 正의 뜻이었네. 힘의 논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정치동네를 보는 듯하다. 가난을, 시민을 볼모삼아 막말 쏟는 저 모양들은 차라리 측은하다. 배고픔의 본디, ‘빽’ 없는 무력감을 그들이 어찌 알랴. ‘나만 옳다’ 우기는 것이 세금 내서 ‘정치의 비용’ 대는 시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모두가 저마다 정의를 부르짖으면 심판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심판, 사정기구나 언론도 대충 ‘나만의 정의’를 부르짖는 막장에 섰다. 옐로카드 쌓이면 퇴장, 하늘이 뒤집힌다. 개벽(開闢)이다. 참 딱한 정의다.
내가 ‘바른 눈’을 가지는 수밖엔 없다. 세상 이치의 여러 기준들이 저마다의 탐욕과 무지로 흔들리면, 내가 세상의 판관(判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 반가운 것은, BTS에다 ‘기생충’ ‘미나리’가 뜨더니 어른들 왕년 골목놀이 소재 ‘오징어 게임’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다는 소식이다. 변방(邊方)으로만 여겼던 우리의 생각이 ‘새로운 기준’으로 지구촌을 매혹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의 기운,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다. 우리가 인류 평화에 공헌하는 일이다. 좀 서운하다 싶어도 ‘어른들’은 눈치껏 빠져주어야 한다. 청년들이 제 역량을 더 펴 정명 이루도록 말이다.
바른 이름, 정명에 바른 눈 떠야 한다는 이치를 문자의 역사는 일러준다. 공부와 명상의 원리이기도 하다. 검색(檢索) 말고도, 사색(思索)과 탐색(探索)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의 반증이다..
이치 곰곰 생각하는 궁리(窮理)없이 어찌 인문(학)이 제대로 서랴. 사람(人)의 글자(文)가 인문학의 첫 계단이다. 문자(文字) 없으면 글 읽다 자칫 허방 딛는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천자를 명목상 최고의 군주로, 많은 제후들이 난립하던 시대입니다.
제자백가의 사상가들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아니라도, 자기를 등용하거나 고담준론을 듣기 원하는 군주를 찾아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