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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붕괴현장의 잔해와 잔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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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붕괴현장의 잔해와 잔해물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2.0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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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우리글진흥원 고문

기자도 소방관도, 모든 시민이 ‘나의 한국어’를 지키자

건설 중인 초고층아파트가 무너졌다. 그 전에는 철거 중인 큰 건물이 무너졌다. 채석장이 무너졌다. 목숨 여럿을 잃었다. 광주와 양주에서 잇따라 벌어진 이 재앙은 하릴없는 인재(人災)였다.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비용절감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어물쩡 안전시스템이 야합(野合)한 결과였다. 사람을 바라보지 않은 기괴한 문명이 보낸 청구서로 본다. 매몰된 인간의 혼신(魂神)을 찾아 수습하는 어려운 과정을 보며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의 뜻을 되새겼다. 무정한 세상이다.

기술문명의 참혹함을 보면서도 세상은 그 뜻을 짐작조차 못하는가. 일부러 안 하는 걸까? 문명의 실패를 바로 보라. 붕괴의 저 잔영(殘影)은 세월호처럼 오래 우리 기억에서 끔찍할 터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당시 현장도 떠오른다. 그 사람들아, 문명아, 그 때 뭐라고들 했느냐?

많은 기자들이 현장 발(發) 기사를 쏟아낸다. 자주 들리는 ‘잔해물’이란 말, 못내 불편하다. 아마 잔해(殘骸)라는 단어의 뜻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 ‘잔해’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채우려고 물건이란 뜻의 물(物)을 붙여 쓰는 말이겠다.

家가 집이고 前이 앞인데 처갓집(妻家-) 역전앞(驛前-) 같이 쓰이는 말은 유의(類義) 반복 겹문자다. 겹말, 중복합성어 등으로 불리나 공식적 어법은 아니다.

동해(東海)바다, 고목(古木)나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등 습관처럼 쓰는 의미중복 겹말이 생활 속에 드물지 않다. 기(期)는 때 기한 등의 뜻, 없어도 될 ‘때’가 괜히 붙은 것이다.

원래, ‘없어도 될 말’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틀렸다고 채점한다. 고치자고도 한다. 그런데 최근 재앙의 현장에서 이런 겹말이 생겨나고 있다. ‘잔재물’도 자주 듣는다.

잔해(殘骸)라는 말, ‘부서지거나 못쓰게 되어 남은 물체’다. 잔해물은 불필요한 말 ‘물(物)’이 붙은 것이다. ‘잔해’로 충분하다. 잔재(殘滓)도 ‘물’을 붙이면 역시 어색하다.

영어 단어는 시시콜콜 따지며 정작 한국어의 쓰임에서는 ‘뜻만 통하면 되지 않느냐.’ 볼멘소리를 한다면 실망이다. 마음 자세의 문제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

어원(語源)을 보자. 잔해(殘骸)의 殘은 잔인한 살육(戔 잔)에서 남은 뼈(歹 알)다. 歹은 살(肉 육)이 없는 뼈 그림이다. 戔은 창(戈 과) 두 개가 겹쳤다. 해(骸)는 뼈 그림 骨(골)과 소리를 만드는 요소인 亥(해)의 합체다. 참혹한 현장에 남은 물건의 뜻으로 (비유적으로) 쓰였다.

잔재의 재(滓)는 물(氵, 水와 같은 글자) 속에 남은 앙금이나 때 같은 찌꺼기다. 골조나 콘크리트 덩이 흩어진 현장의 ‘남은 물체’와는 어감(語感) 차이가 크다. 재(宰)는 발음요소다.

살펴본 것 것처럼, 잔해와 잔재는 ‘그게 그것’인, 비슷한 말이 아니고 차이가 엄연한 말이다. 저 경우의 ‘잔재’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것이다. 이런 차이는 한국어의 다양성을 살리는 풍부한 어휘의 바탕이다. ‘문자 속이 깊다.’는 말의 뜻이기도 하다.

뉴스에서 기자가 쓰는 말은 사실상 일반인의 (언어)교과서다. 잔해물이란 말에 처음에는 어색해 했을 (경험 많은) 소방관, 건축 관계자, 시나 도의 담당관들도 신문과 방송이 자꾸 ‘가르치니’ 자연 그 말이 입에 옮아 TV의 ‘잔해물 타령’에 동참하고 만다.

특히 개념어(槪念語)에 덜 익숙한 젊은 기자들이 쓰는 명확함 부족한 어휘 때문에 한국어가 상처를 입는 것이다. 줏대 있는 ‘나의 한국어’를 지키는 것은 명예로운 시민의 일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우리글진흥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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