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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스토킹, 보복 범죄 언제까지 방치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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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스토킹, 보복 범죄 언제까지 방치할건가?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22.10.0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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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최근 서울지하철 여자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스토킹을 당해 살해당했다. 그것도 해당 지하철 역무원이라고 하는데 변두리도 아니고 서울 중심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에 의구심과 놀라움이 매우 크다.사고를 당한 여자 역무원은 평소 책임감과 업무 의욕을 가지고 화장실을 순찰했는데 이때 한 남자로부터 흉기 살해를 당했다. 그런데 가해자도 지하철 직원이라고 한다. 정말 황당한 사건이다. 가해자는 그동안 피해자를 협박하다 고발당했고 재판받자 보복 범죄를 벌인 것이다.스토킹 범죄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스토킹 행위의 공통적 특성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반복적’, ‘괴롭힘’이다.

피해자에게 신체적으로 접근해 위협을 가하는 전통적 유형의 스토킹 행위뿐만 아니라 최근 온라인 공간의 사이버 스토킹 범죄 또한 심각하다.휴대전화나 SNS 메시지, 온라인 게임 채팅까지 동원하고, 피해자 전화번호로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해 괴롭히는 등 범죄 유형이 시간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스토킹처벌법’은 1999년 국회에 처음 발의되었으나 무려 22년 동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사적 애정표현이나 구애와 구분하기 어려워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2021년 10월 21일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국민의 여론에 떠밀려 서둘러 시행되었지만, 지난해 경찰이 접수한 스토킹 범죄 신고(4515건) 중 처벌에 이른 것은 10%에 불과했다.

스토킹 행위는 살인과 폭력으로 발전할 강력한 위험 요인을 내재한다. 미국에서 실시한 강력범죄에 대한 ‘추가적 피해자 조사’에 따르면 스토킹과 함께 신체적 혹은 성적인 폭력을 당한 사례가 21%에 달했다. 한국에서도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스토킹 행위로 유죄가 선고된 판결 267개의 분석 결과 절반 이상이 강간이나 상해 폭행 협박 주거침입 업무방해 등 다양한 신체적 폭력이나 성폭력 범죄의 특징을 보였다. 특히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의 30~40%에서 스토킹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는 스토킹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사법기관의 초기 대응부터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보다 20여 년 먼저 스토킹처벌법을 도입한 영국의 경우 피해자를 위한 임시 보호명령을 위반하면 최대 징역 5년에 처한다.하지만 신당역 전주환 사건처럼 피해자 보호조치를 어긴 가해자들 다수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작가 린덴 그로스에 따르면 스토커는 ‘소유’ 아니면 ‘파괴’라는 극단적 감정 사이를 오가는 정체성 부재자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상대방을 괴롭히고 굴복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상대의 거부 의사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신과 표적을 모두 파괴하는 극단적 행동을 보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스토킹은 남녀관계에서 용인 가능한 행위로 치부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상대가 거절해도 연락하고, 집 앞에 찾아가고, 협박하는 일방적인 집착과 폭력이 순애보나 짝사랑으로 포장된다. 언론의 보도 행태는 어떠한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 제목과 내용부터 ‘원한’, ‘보복살해’와 같은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해 사건의 책임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전가한다.스토킹을 젠더 폭력으로 호도하지 말라던 여성가족부 장관은 서둘러 대책으로 ‘피해자 상담’을 내놓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토킹 범죄의 위험과 본질을 흐리는 국가 권력의 참담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가해자의 책임을 경감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범죄는 ‘성폭행이나 가정폭력 같은 오직 젠더 관련 범죄뿐’이라는 변호사 조디 래피얼의 일갈을 곱씹어야 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을 요즘처럼 많이 들어본 적도 없는 거 같다. ‘십벌지목(十伐之木)’, 한자 그대로 직역하면 열 번 찍어 배는 나무라는 뜻이다. 이를 쉽게 풀면 아무리 뜻이 굳은 사람이라도 여러 번 권하거나 꾀고 달래면 결국은 마음이 변한다는 말로 여기서 나무는 사람을, 열 번 찍는다는 것은 권하고 꾀는 노력을 의미한다. 일상의 남녀 관계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이 속담은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풀이되지만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애끓는 순애보’, ‘짝사랑’이 아닌 애정을 빙자한 폭력, 범죄로 인식해야 할 거 같다.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쾌감과 두려움을 주는 ‘스토킹’을 우리는 이제껏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토킹의 극단적 형태는 상대에 대한 물리적 폭력이다. 지난해 3월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 같은 해 12월 송파구 피해자 어머니 살해사건 등 스토킹 살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에서 순찰근무 중이던 20대 여성 역무원이 스토커에 의해 살해당했다. 범인은 피해자를 스토킹한 혐의로 두 차례나 기소됐고, 첫 고소 땐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고, 두 번째 고소 땐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조치가 미흡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가 희생돼야 법을 고친다고 떠들썩하다. 우리보다 스토킹 처벌법이 20, 30년 먼저 제정된 미국 영국 등은 처벌 수위가 높다. 영국에서 스토킹은 최대 징역 10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다. 신당역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충격이 크다. “남의 일이 아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 대책에 손놓고 있던 여야 정치권이 반의사불벌 조항을 폐지하는 등 뒤늦게 재발 방지를 위한 입법에 나선다고 한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국회가 개정안 통과에 힘을 모으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제도 보완에 나서야 한다.

여성을 향한 잔혹한 범죄는 한 명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문화’와 이를 알고도 하찮게 여기는 권력의 방조, 태만 속에서 확산된다.스토킹이 범죄가 아니라 ‘로맨스’ 혹은 ‘미숙한 표현 방식’으로 미화되는 점이 바로 이런 문화의 방증이다. 스토킹을 여성 개인이 조심해야 할 문제, 나쁜 남자 한 명의 문제로 결코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를 직시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안전은 요원하다. 오직 죽음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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