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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소치(所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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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소치(所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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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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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부족의 소치, ‘덕’ 말고 ‘족’이라. 법률용어인가?  

대통령이 ‘엑스포 유치 실패’를 계기로 ‘부족의 소치’라는 낯선 언어를 반포(頒布)하니 ‘부덕의 소치’ 풍(風) 소치타령이 재연될 전망이다. 대부분 언론이 그 말을 제목 삼았다. 질의응답도 없었다니 ‘대충 그렇게 알아들으라.’는 것이었을까?  

“짐의 탓으로 오늘의 이런 참상을 보게 되니, 다 부덕의 소치로다.” 임금이 끔찍한 상황을 당한 백성들을 향해 자책(自責)하는 어법(語法)이다. 공감의 위로일 수도 있겠고, 물론 (어질고 어진) 나라님으로서의 정치적 수사(修辭)일 수도 있다. 

한자로 不足이었겠다. 덕(德)이 무용지물이 된 세상에서, 부덕(不德) 보다는 부족(不足)이 제격이었을까? 

德은 호오(好惡·좋고 싫음) 선악(善惡·착하고 악함) 미추(美醜·아름답고 추함) 등을 넘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또는 그 크나큰 기운을 담는 마음 그릇이다. 설명 어려우니 대충 ‘크다’라는 뜻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도덕 과목,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들어있는 글자다.  

족(足)은 어원 상(上) 발로 걸어가서(止나 之·지) 저 성(囗 국)을 차지함이니, (‘서울의 봄’처럼 성공하면) ‘만족’ 할 만하다. 그 부정형이니 만족하지 못함이고 (물통에 물이) 덜 찬 것이다. 

사전은 부족을 ‘필요한 양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이라 푼다. 물론 발(足)에서 시작된 비유가 새 뜻들을 만들었다. 

‘역량(力量)이 부족했다.’는 걸 유식하게 말한 ‘문자’이리라. 뭔가 있어 보여야 할 터, 해설을 붙여야 할 정도는 되는 말을 고르고 그걸 가공(加工)한 모양새다. 애써 德(덕)을 지우고 足(족)을 넣은 창의력까지, 참 수고가 많았다. 

한자는 한 자 한 자가 다 뜻을 갖는 단어다. 어떤 글자(단어)도 합쳐 새로운 말을 만들 수 있다. 허나 여태 ‘부족의 소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자괴(自愧)의 소치가 없지 않다. 그 말을 선택한 의도나 ‘부덕의 소치’와의 차이도 궁금하다. 하여간, 처음 보는 말이다. 

‘소치타령’은 꽤 여러 가락이다. 대충 펴보자. 과문의 소치, 무능의 소치, 무력의 소치, 무지(식)의 소치, 오만의 소치, 패배주의의 소치, 편견(偏見)의 소치, 혈기(血氣)의 소치, 천륜의 소치, 몰이해의 소치, 천박의 소치...

과문(寡聞)의 소치는 (귀로) 들은 바가(견문이) 적어서, 천륜(天倫)의 소치는 부모형제 사이의 도리 때문에, 천박(淺薄)의 소치는 공부나 생각이 얕거나 말과 행동이 상스러운 까닭에 빚어진 상황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정서적) 책임 전가로 볼 수도 있다. 

‘공공(公共)의 언어’를 늘 생각하는 책상물림의 입장에서, 이런 낯선 문자군(群) 또는 생소한 어휘의 등장은 별로 반갑지 않다. 생뚱맞지 않은가. 

지 해박(該博)한 문자 속을 깃발 날리고 싶어 하는 유명한 이들 몇몇 있다. 특히 삼국지(연의)의 구닥다리 얘기 곁들인 사자성어로 현대의 글로벌 한글세대를 감동시키려는 그 노력이 실은 ‘개콘’이 되고 만다는 것을 왜 모를까.

부탁, 대통령 발(發) 소치타령에 동참하더라도 ‘부덕의 소치’는 쓰지 마시압. 당신과, 그 말의 소비자일 청자(聽者)나 독자 사이의 역학(力學)을 연구한 다음 신중하게 쓸 것. 자칫 틀리기 쉽고 오해 생기기 삽상이니. 당신에게 德을 기대하거나 주문한 분(들)이 있는지도 확인할 것. 

무식소치 들통 나는 건, 순간이다. 한 큐에 간다, 호 선생, 알간?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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