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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다방이 가져다 준 기다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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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다방이 가져다 준 기다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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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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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1980년대 5월. 김포 들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계 모내기가 도입되던 초창기다. 들판에는 10∼20여 명씩 줄 서서 손 모내기하는 대신 군데군데 3인 1조가 되어 기계 모내기로 붐비었다. 이앙기라는 문명의 이기가 모를 심었다. 
현장 지도하는 면사무소, 농촌지도소 직원들도 들판을 메운다. 여기에 기계로 모내는 것이 신기해 마을 어르신들이 나와 들판을 서성인다. 마치 들판은 개미들이 개미집 들락거리는 것만큼이나 혼잡했다.

아침부터 수많은 일개미 중에 여왕개미 같은 존재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농촌지역 다방은 농번기가 되면 비수기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다니는 마케팅이라 하여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논두렁 밭두렁을 넘나들며 커피를 배달해 주었다. 또 얼린 물을 한 통씩 갖다가 나눠 주곤 했다. 몇몇 사람은 그 바쁜 와중에도 다방 아가씨와 마주 앉아 커피잔을 마주한다. 커피잔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걸쭉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다. 

이런 장면은 일상생활이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나에게 땅바닥에 주저앉은 마을 이장이 손을 흔들며 커피 한잔하라고 큰 소리로 부른다. 자판기 커피에는 비교도 안 되는 섬섬옥수로 따르는 사기진작의 커피 좀 마시란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무엇인지 몰라 거들떠보지도 않자 다방 한번 가 보았냐고 야유를 보낸다. 

내 나이 이십 대 중반 겨울이었다. 군대 생활을 같이했던 선배를 만나러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선배 집을 찾아가기 위해 인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에 이르러 정류장에서 내렸다. 집이 몇 채밖에 없는 곳이라 버스가 떠나간 후로는 한적하다 못해 고즈넉했다. 외출한 선배가 늦게 귀가 한다고 한다.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친구 부인의 말을 사양하고 버스에서 내릴 때 보았던 다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지난봄 모내기 철에 다방 한번 가 보았냐는 야유 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버스정류장에 앞 건물 이층에 있는 허름한 다방이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저히 실내에 들어온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선 기온이 바깥 온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방 안의 정경은 요즈음 같으면 토속적인 실내 장식이라고 점수를 후하게 주겠지만, 좀 심하게 말해서 수십 년 묵은 의자와 테이블 몇 개 갖다 놓은 것이 전부다. 학교 교실에나 있을 법한 녹이 슨 커다란 무쇠 난로에다, 이발소에서 면도할 때 비누칠한 솔 문질렀던 것처럼 누런 거품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는 연통하며, 보는 것마다 눈 길하나 정(情) 붙일 곳이 없었다. 한쪽 벽 선반에 얹힌 TV는 방송국의 아나운서와 탤런트들이 다 퇴근했는지 깜깜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추워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는데, 실내온도에 어울리지 않게 뜨겁게 끊인 커피를 갖고 온 주인인 듯한 중년의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주인 눈치 보지 말고 손님이 알맞은 온도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장작을 알아서 넣으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작불의 열기가 아닌, 그 말의 느낌만으로도 온몸이 포근해졌다. 

주인의 말 한마디로 인해 눈길 하나 줄 곳 없었던 다방 안의 모든 사물에 애정의 시선이 갔다. 시내 다방에나 있는 ‘울어라 열풍아’가 흘러나오는 뮤직 박스가 없으면 어떻고, 난로 통이 지저분하면 어떠한가. TV가 안 나오면 조용한 대로 좋았으며, 불어대는 바람에 덜컹대는 창문 소리에도 낭만이 흘렀다.

장작 타는 소리만 날 뿐 다방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늘의 운세’라는 쪽지가 나오는 재떨이 대신 다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농민’과 ‘선데이 서울’이 있어 다방 같지 않게 느껴졌다. 창밖 북쪽의 상수리나무의 낙엽이 바람에 싸르르 싸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남쪽의 선팅 안 된 창문으로는 언 땅에 내린 서리가 달빛에 하얗게 보였다. 

멀리 달빛이 메우고 있는 산골짜기에서 조용한 음악이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검은 산 그림자 밑에 있는 선배의 집은 작은 네모진 창문으로 불빛 윤곽만 보였다. 하행선 막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아래층 가게 덧문 닫는 소리에 선배는 만나지도 못하고 다방 문을 나섰다. 

추억의 다방이 생각나 주변을 찾아봤지만, 온통 카페뿐이다. 더 깔끔해지고, 세련된 인테리어와 고급스런 커피들로 나를 유혹하지만, 오늘만은 왠지 곰삭은 정경이 그리워진다. 어떻게 약속도 없이 선배가 오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리냐는 핀잔이 있겠지만 가끔 그런 기다림이 낭만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지금처럼 단 한 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네 일상이 너무나 빡빡하고 정(情)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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