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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도(度)라는 그릇의 은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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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도(度)라는 그릇의 은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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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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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금도(襟度)는 ‘남을 (너그럽게) 포용(包容)하는 도량(度量)’이다. 

은유적인 언어여서 풀이하는 말의 깊이도 만만치 않다. 포용은 남을 감싸거나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량은 길이나 부피, 무게를 재는 잣대나 통(桶)과 같은 기구다. 

襟度의 度는 저 통이다. 襟은 가슴(마음)이다. 마음의 크기를 재는 통이란 뜻으로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말이 됐다. 대장부의 금도는 하늘처럼 호연(浩然)해야 한다, 이런 말이 불과 반세기 전(前)의 교육에서 자주 활용됐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금도는 ‘통이 크다’는 말이다. 통이 크면 바다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襟度도 浩然之氣(호연지기)도 스러진 터전에서 저 아름다운 말 ‘금도’의 뜻이 심하게 비틀어지고 있다.

싸구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그들은 그렇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는 투의 문장을 보자. 여기서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은 남녀 간의 불륜(不倫) 관계나 마약 등 약물중독 같은 주제를 다루는 표현이다. 싸구려 티가 물씬해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의 뜻으로 정치나 언론의 일부가 ‘금도’란 단어를 치켜들었다. ‘금도를 넘어섰다’는 식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의 뜻을 빚어 주로 남을 공격하는 데 쓰는 것이다. 

학자들이 간간이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영향력 큰 이들의 이런 비틀린 언어는 잊힐 만하면 튀어나온다. 정치동네의 용법(用法)을 보면 ‘금도’를 ‘도리(道理)’와 혼동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해야 할 바’가 길 道자 쓰는 도리다. 

그러나 襟度는 ‘넘어서는 안 될 선’도 ‘사람의 해야 할 바, 도리’도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한자가 드물게 된 후에 빚어지는 현상으로 본다.

최근의 이 보도는 저으기 당황스럽다. 그야말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있다. 정치인(들)의 무지의 언어는 드물지 않으니 그렇다 치자. 언론이 이를 다루는 행태의 퇴영(退嬰)을 말하는 것이다. 

박범계 장관은 "저는 여러분(취재진)이 그분의 실명을 물을 때마다 거명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금도(禁度·넘지 말아야 할 선)라는 게 있다. 무슨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4월 8일)

한자 쓰는 한중일 3국의 어떤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禁度라는 정체불명의 한자 단어를 만들어 올리면서까지 한국어 어휘 활용의 정도(正道)를 단번에 배신하고 말았다. ‘글’을 도구로 살아가는 기자라는 직업의 뜻을 회의하게 하는 상황이다.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독립된 단어이며, 글자들이 서로 합쳐져서 여러 뜻의 말을 지어낼 수 있다. 그러나 금지한다는 뜻 禁과 통(도량)의 뜻 度를 합쳐서 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될 수는 없다. 금도라는 단어 모두를 사전서 찾아도 저런 이상한 낯짝의 말은 없다.  

이리하여 ‘남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이라는 襟度의 동아시아 특유의 미덕(美德)이 불륜이나 약물중독의 비천하고 짜잔한 상황의 언어로 온통 구정물을 바르게 됐다. 천상(天上)의 언어는 이렇게 시나브로 막말로까지 타락하고야 마는가?

제 언어의 아름다운 뜻을 지키는 일은 모두의 역할이다. 정치나 언론의 이런 무지와 생떼 언어도 이제 시민이 지켜야 한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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