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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40] 추석의 소소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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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40] 추석의 소소한 단상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6.09.21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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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특정인의 희생으로 치러지는 명절은 희생절이지 명절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는 일이 명절에도 이어진다면 명절은 그야말로 우리의 축복이 될 수 있다.”
 
올 추석 연휴는 여느 해와 달리 길었다. 주말까지 5일간의 연휴였다. 이 기간 동안 3700만 여명이 움직였다. 추석 당일에는 500만대가 넘는 차량이 고속도로를 메웠다. 가히 민족의 대이동이다.

긴 연휴로 인해 부모님이 보따리 싸들고 도회지 아들네 집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됐다. 아내도 “장모님은...”하며 신랑을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더 좋은 것은 하루 일찍 돌아와 쉴 수도 있었다. 추석 연휴 일정을 짜면서 가족간의 협상은 난항을 겪지 않아도 됐다. 고향 집도 찾고 처가에도 들리고, 돌아와 영화 한 편도 볼 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명절연휴가 즐겁지만은 아닌 날이 되고 있다. 명절 이후 부부싸움도 가장 많고 결국은 이혼하는 비중도 명절연휴 직후가 가장 많다는 보도는 이제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특히 아내와 달리, 며느리들은 명절 연휴는 상당한 심적 부담이다. 긴 연휴에 비례하여 부담도 늘어난다.

시부모님이 오시지 않으니 이 것 저 것 시장을 보고 피난길 같은 머나 먼 길을 달려야 한다. 시댁에 가면 더 힘들다. 음식상 차리는 것이 그렇고 얼굴에는 항상 상냥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어른이 친척이라고 찾아와 시시콜콜 간섭하고 질문공세까지 벌이면 나도 몰래 짜증이 난다. 시댁에서는 남편도 무심하고 눈치 없고, 게다가 게으른 ‘남의 편’이다. 명절이 없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불편한 것은 남편도 마찬가지다. 표정이야 맘씨 좋은 사람처럼 웃고 있지만 초고속 LTE보다 빠르게 어머니와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두 여인이 서로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없나 살피는 것이다. 어느 편도 들 수 없다.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일은 내일로 가는 사다리를 불태워버리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중간지대가 안전지대는 아니다. 양쪽 모두로부터 버려지는 길이 중간지대이다. 한 마디로 설 땅이 없다. 그만 쉬고 싶은데 이젠 처가에 들려야 한다. 남편도 명절이 없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어디 명절을 없앨 수야 있겠는가.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진 두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아들은 큰 위로가 되고 친정아버지의 눈길만 보아도 눈물이 글썽여지는 딸이지 않는가.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장성한 아들내외의 사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고 금싸라기보다 귀한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것만으로도 삶을 지탱하는 두 발에 힘이 솟는다.

그런 게 우리의 명절이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쁨을 상실하는 것 보다 더 할 수는 없다. 어떤 가치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우리의 전통이기도 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추석 연휴기간 동안 남도 끝자락 섬인 진도의 한 마을에 현수막이 내 걸였다. ‘애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노인회관 앞길에 걸린 현수막 내용이다. 이 마을 이장단협의회는 귀성길 고단함과 명절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는 며느리와 자녀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담아 현수막을 걸었다. 며느리와 자녀들이 먼 곳까지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효도라는 생각에서 현수막을 걸었다 한다. 내년 설에는 더 많은 현수막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즐거운 날이 불편한 날로 바뀌는 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다. 명절이 본래의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절의 의미와 가치는 지키되 방식은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조상을 기리고, 부모님을 찾아뵙고, 형제끼리 우의를 다지는 가치는 변함없이 지켜져야 한다.

반면 명절날에는 집안의 하인이 되는 며느리의 풍습은 사라져야 한다. 딸이 귀하면 며느리도 귀한 법, 명절엔 며느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남녘 섬 시아버지들처럼 남편이, 시아버지가 부엌에서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다. 며느리도 명절이 즐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의 희생으로 치러지는 명절은 희생절이지 명절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는 일이 명절에도 이어진다면 명절은 그야말로 우리의 축복이 될 수 있다.

내년 추석명절에는, 아니 당장 내년 설날부터라도 명절에 앞치마를 두르는 남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명절 직후가 이혼률이 가장 낮다는 뉴스를 보고 싶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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