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로 '윤현진 선생' 선정
상태바
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로 '윤현진 선생' 선정
  • 백인숙기자
  • 승인 2018.04.03 08: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현진 (尹顯振, 1892. 9.16~1921. 9.17) 선생을 2018

 

 

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 가입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만성재(晩惺齋)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가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1914년 메이지(明治)대학을 입학한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국내에서 대동청년단과 교육운동에 매진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서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

3ㆍ1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1일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 조직, 독립신문 발기인 등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1919년 9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에 취임해 살림을 책임지게 된다.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1921년 9월 그동안의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선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16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해 선생을 추모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