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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승정원(承政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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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승정원(承政院)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5.02.12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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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명출납 기구인 승정원은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이다.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나 나머지 5명의 승지·부승지 모두 정3품(차관보급)이었다. 비록 판서(장관)보다 두 단계나 아래 직급이지만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요직이라 실력과 배경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거쳐갔다. 권세가 정승을 압도하기도 했다. 세조 때 한명회, 정조 때 홍국영이 그러하다. 이에 승지를 임금의 목구멍과 혀를 맡았다는 뜻에서 후설지직(喉舌之職)이라고도 불렀다. 승지는 출세가 보장됐지만 가장 바쁜 자리였다. 사경(四更·새벽 2~4시)이면 대궐에 나가 성문이 열리는 파루(罷漏)가 되기를 기다렸다. 새벽 4시쯤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33번의 종을 쳐 파루를 알리면 대궐에 들어 밤늦게 귀가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서실의 업무 강도는 높지만 요즘과 확연히 다른 점은 왕명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당한 왕의 전지(傳旨)를 다시 봉해 반납하는 ‘봉환(封還)’이란 관행이 있었다.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장관의 품계에 따라 정1품 아문(衙門ㆍ관청), 정2품 아문 하는 식으로 관청을 구분했다. 예를 들면 정1품 영의정이 수장인 의정부(議政府)는 정1품 아문이고, 정2품 판서가 장관인 육조(六曹)는 정2품 관아이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承政院)은 몇 품 아문이었을까?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漢城府)가 정2품 아문이고, 사헌부(司憲府)가 종2품 아문인데 비해서 승정원은 정3품 아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승정원은 다른 아문과 큰 특징이 있었다. 승정원의 승지 6명의 품계가 모두 같은 정3품이라는 점이었다. 도승지와 좌ㆍ우승지는 물론 좌ㆍ우부승지(副承旨)와 동부승지(同副承旨)처럼 부(副)자가 붙는 승지들도 모두 정3품이었다. 또한 여섯 승지는 모두 자신의 고유한 업무가 있었다. 도승지는 이조를 담당하는 이방(吏房), 좌승지는 호조를 담당하는 호방(戶房)이었는데 동쪽에 앉는다는 이유로 동벽(東壁)이라고 일컬었다. 우승지는 예조를 담당해 예방(禮房), 좌부승지는 병조를 담당하는 병방(兵房)인데, 서쪽에 앉으므로 서벽(西壁)이라 일컬었다. 우부승지는 형조를 담당하는 형방(刑房)이고, 동부승지는 공조를 담당하는 공방(工房)이었다. 그러나 직급이 같다고 위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승지들은 도승지를 공경해서 감히 농담을 하지 못했다. 이를 어겼을 때는 벌로 주연(酒宴)을 내어야 했다. 도승지 홍섬(洪暹ㆍ1504~1585)은 유생 송강(宋康)과 사주(四柱ㆍ태어난 해,달,날,시)가 같았다. 그런데 홍섬과 송강은 모두 기생 유희(兪姬)와 가깝게 지냈다. 송강이 먼저 죽자 홍섬이 “나와 같은 날 같은 때 태어났는데 먼저 죽었고, 빈한하고 영달한 것이 같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사주가 같은데 어찌 팔자는 다르냐는 말이었다. 동부승지 이준경(李浚慶ㆍ1499~1572)이 이 말을 받아서 “도승지 영감께서 유희를 사랑하셨는데, 송강도 유희를 사랑했으니 명(命)만 같은 것이 아니라 행한 일도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연려실기술은 여러 승지들이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했고 여러 서리(吏)들도 전고(前古)에 없었던 큰 변고라고 놀랐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준경은 집에서 일곱 번이나 벌연(罰宴)을 베풀고 나서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승지와 다른 승지 사이의 위계질서는 분명했다. 그러나 업무에 있어서도 무조건 도승지의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성종 9년(1478) 도승지는 임사홍(任士洪ㆍ1445~1506)이었다. 임사홍은 성종 즉위 후에 책봉한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에다가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로서 권력의 배경이 튼튼했다. 당시는 사림 세력이 훈구 세력의 전횡을 비판할 때였는데 임사홍은 시종 훈구 세력을 옹호했다. 성종 9년(1478) 4월 효령대군의 종손인 이심원(李深源)이 ‘세조조의 훈신(勳臣)을 써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세조(수양대군) 때 형성된 공신 집단을 배제해야 한다는 대담한 상소였다. 도승지 임사홍은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모름지기 옛 신하(耆舊)를 써야 합니다”라고 반박했다. 흙비(土雨)가 내리자 대간에서는 하늘의 견책이라면서 임금의 수성(修省)을 요구했다. 그러자 임사홍이 “예로부터 천지의 재변은 운수(運數)에 있으니 운성(隕星ㆍ별똥)도 역시 운수이며 지금의 흙비도 때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이지 어찌 재변이겠습니까?”라면서 하늘의 경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임금의 정사 잘못 때문에 흙비가 내린 것이 아니니 수성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대간에서 일제히 “임사홍이 말한 바는 모두 옛 간신의 말”이라고 탄핵했다. 성종의 마음은 자신의 정사를 옹호한 임사홍에게 있어서 대간들을 추고(推考ㆍ벼슬아치들을 신문하는 것)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러 승지들이 대간 대신 도승지 임사홍을 비판하고 나섰다. 임사홍을 제외한 나머지 승지 전원이 승정원 명의로 “(대간에서) 나랏일을 말했는데 도리어 견책하는 것은 불가합니다”(성종실록 9년 4월 28일)라면서 추고해서는 안 된다고 대간편을 든 것이다. 다른 승지들까지 도승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대간에 가세하자 성종도 할 수 없이 임사홍을 의주로 유배 보내야 했다. 성종이 그나마 중간 정도의 군주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정사를 무조건 옹호하던 임사홍을 유배 보낼 정도의 분별력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승지들도 위계질서는 엄격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성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자존심은 갖고 있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문건 유출, 민정수석의 항명 사퇴에 이어 문건 작성 배후를 둘러싼 논란으로 선임행정관이 사퇴하는 등 온 나라가 청와대 비서실발 막장 드라마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천고(千古)를 넘어 만고(萬古)에 없던 사태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2013년 8월 취임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그해 10월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했다. 세간에 김 실장을 ‘왕실장’, ‘기춘 대원군’ 등으로 부른다는 게 화제가 됐다. 김 실장은 “나는 대통령 뜻을 밖에 전하고 바깥 이야기를 대통령께 전할 뿐”이라며 “옛날 말로 승지(承旨)”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임기 말 술자리에서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도승지, 한잔 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조만간 단행이 예상되는 청와대 인적 개편에 이례적으로 비서실장 교체 여부가 최대 관심이다. 그만큼 김 실장의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방증이다. 태종은 “비록 정3품의 관리이지만 국가의 큰일에 참여해 결정하니 재상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정도로 승지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보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500년 장구한 조선 역사에서 막강 권력의 도승지를 정3품에 머물게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이라는 경구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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