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해법' 제시가 정치인 본분
상태바
'해법' 제시가 정치인 본분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5.11.19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면, "정치는 정파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정치인은 정당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데,그 정당이란 정파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당을 의미하는 용어가 영어로 ‘party‘인데,그 어원을 보면 ‘부분‘을 뜻하는 라틴어의 ‘pars‘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를 이처럼 파당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다원주의 사회의 특징은 잘 드러난다. ‘절대적인 선‘이 군림하기보다는 다양한 선들끼리,심지어 다양한 악들끼리 경합하는 사회가 다원주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정치는 정파적인 것"이라고 할 때,공동선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정권이건 출범하면서 자기 사람만을 쓰지,남의 사람을 쓰는 경우는 없다. 진보정권 때나 보수정권 때나 같은 성향의 인사만 기용하니까,‘코드인사‘니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정치인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혹은 자신의 지역만 생각한다. 물론 많은 정치인들이 ‘정파적 선‘만 추구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을는지 모른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라는 것이 있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신비한 힘에 의해 공공의 이익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빵집 주인이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면 그 시간까지 밥을 먹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파적 이익만 추구하다보면,저절로 ‘공동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여당은 밀어붙이고 야당은 반대만 하고,공항을 유치하겠다고 지역끼리 격렬하게 싸우는 등,흙탕물 싸움을 하면 어느덧 국리민복과 같은 공공의 이익이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듯‘ 저절로 나올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이기심이 모여 저질스러운 상황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게을러 자기 집 주변을 불결하게 만들면 청소를 잘해놓은근처의 다른 모든 집들도 지저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케인스는 ‘구성의 오류‘라고 했다. 실제로 정치인 각자가 서로 간에 "내 이익을 챙기겠다"고 행동할 때 ‘공동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악‘이 될 수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 익히 보아왔다.
최근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지난 3일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후 보수와 진보세력간 갈등은 더욱더 증폭되고 있다. 야당은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면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농성에 들어갔고, 여당은 야당에 교과서 논쟁을 중단하고 국회 복귀를 촉구하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정치인의 기본과제는 국민이 즐겁게 일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공자는 위나라 순행 때 제자 염유에게 “위정자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 생활을 풍요롭게 한 다음 백성들을 가르쳐서 인간다운 길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맹자도 제나라 선왕에게 “현명한 군주들은 백성들에게 풍년에 배불리 먹게 해주고 흉년이 들어도 굶어죽는 것을 면하게 해 주어 민생을 안정시키고 난 후 백성들이 착한 길로 가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성현들은 정치인들이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설파했다. 국민들이 걱정없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며, 정치인이 실천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일자리가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고, ‘내편 니편’ 갈려 갈등이 깊어져 힘들어하는 데도 정치인들은 쌈박질에만 열중이다.
지금 한국정치는 실종된 상태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나라 걱정이 태산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더 힘들게 하는 정치인들에게 ‘본분을 지켜라’고 질타하는 공자와 맹자가 목소리가 들린다. 다만 나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가" 고민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유감이다.
"내 입장에서,내 지역의 입장에서,내 이념적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질문만 하는 정치인이라면 ‘정파적 정치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정치인이야말로 ‘진정한 정치가‘가 아닐까.
또 지역,보수와 혁신,세대 간 다툼의 소지가 있는 중대 쟁점들이 발생할 때마다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든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깰 수 없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배짱 있는 정치가‘가 몇 사람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운동경기처럼 상대방과 더불어 격렬하게 다투고 싸우는 데서 ‘정치의 묘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술사가 소매에서 갑자기 새를 끄집어내 청중들을 열광시키듯, 우리 정치인들도 다툼과 대립으로 얼룩진 사안에서 화합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정치에 대한 묘기‘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