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조선시대 과거시험
상태바
조선시대 과거시험
  • 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5.12.10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에 관료가 되는 방법은 과거(科擧)·음서(蔭敍)가 있었다. 음서는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으로 문음·천거 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과거는 출신과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당락이 결정됐다.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다. 문과는 학문의 깊이가 시험대상이고, 무과는 무예가 주 시험대상이고, 잡과는 역관, 의관 등 기술관료를 뽑는 시험이다.
과거라 하면 주로 문과-소과(小科)와 대과(大科)로 분류됐다. 소과인 생원, 진사는 일종의 학위를 주는 시험이나 합격하면 김생원, 김진사로 우대했다. 사마시(司馬試)인 생원·진사시험 합격자 중에서 대과는 정식 관료 33명을 선발한다. 3년(식년시·式年試)마다 33명을 선발하기 때문에 매년 11명을 뽑는다고 봐야 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별시가 있었다.
일단 합격하면 6품 이상의 당하관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 있었다. 3년마다 정기시험에는 합격 정원이 문과 33명, 무과 33명, 생원 100명, 진사 100명, 잡과 46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반면 비정기적인 문·무과는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본인-아버지-할아버지까지 3대에서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대접을 받았다. 1792년 정조 임금이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어명으로 특별히 실시한 과거에 영남지역 응시생이 무려 7228명이었으나 합격자는 11명에 불과해 600~700대1로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나이 50세에 우의정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미관말직을 받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요즘의 국토해양부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연암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64세에 이르러 양양부사에 올랐는데 15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종3품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학자이자 초서로 유명한 미수 허목(1595∼1682)도 56세 때 처음으로 최하 말직인 참봉(종9품)의 벼슬을 받았고 80세에 이르러 참판(종2품)에 오를 수 있었다. 명재 윤증(1629~1724)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36세 때 처음 종9품인 내시교관에, 53세에 성균관 사예(정사품)에 임용되었지만 관직을 받지 않았고 68세에 이르러 공조판서를 내렸는데 그래도 나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는 대학자여도 종9품에서 관직을 시작하는 게 관행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최말단인 종9품에 임용되었다. 요즘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5급 공무원이 되고 경찰대를 나오면 곧바로 파출소장에 임명하는 것도 난센스다.
인재가 많지 않았던 개발도상국 시절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요즘처럼 인재가 넘쳐나고 전문가나 경력자가 홍수인 시대에는 5급 공무원 시험이나 경찰대의 파출소장 임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 교수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교수가 아니어도 인재들은 널려 있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은 무려 59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과거시험은 요즘 사법고사나 행정고시 공부하는 것보다 더 경쟁이 치열했다. 3년에 한 번씩 보는데 단 70명 정도밖에 뽑지 않았다. 대부분 30대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다 계속 떨어지면 포기를 하는데 김득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거시험을 때려치우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늦게 나간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첫 관직으로 성균관 학유(요즘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동료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홍천현감과 정선군수에 뽑혔지만 신하들이 그를 적임자가 아니라고 저지하는 바람에 결국 부임하지 못했다.
결국 김득신은 7년 동안 벼슬을 하다 68살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기와 끈기로 예순을 앞두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보람도 없이 초라한 귀향이었다. 충북 괴산에 가면 ‘취묵당’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김득신이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말년을 보낸 곳이다.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시를 416수나 남겼다. 신흠·이정구·장유와 함께 조선시대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인으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고위 공무원에는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신기남 의원이 2006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이었을 때 그의 아들이 한미 의회가 경비를 대는 22일간의 미국 연수를 다녀온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신 의원의 아들이 대학생 시절 다녀온 이 연수는 ‘한미 의회 청소년 교류사업 프로그램’으로, 선발되려면 통외통위 소속 의원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실세였던 신 의원은 “심사 과정에 압력을 행사한 바 없다”며 “특히 2차 영어인터뷰는 외부에 위탁했기 때문에 개입할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신이 아들을 추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들을 추천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도의적으로 큰 문제다.
신 의원은 2004년에도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친일 등 과거사 정리에 앞장서다 부친이 일제강점기에 헌병 오장을 지낸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처음에 한동안 잡아떼다 결국 시인하고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부친이 친일이라서가 아니라 부친의 이력을 숨기고 남을 친일파로 모는 데 앞장선 이중성이 분노를 사고 최근에도 신 의원은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아들을 위해 학교 측에 압력을 넣은 의혹으로 당 차원의 조사를 받았다. 새정치연합 당무감사원은 압력 행사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했다면서도 사려 깊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 윤리심판원에 ‘엄중한 징계’를 요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