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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국가보훈처 보비스 선포 9주년을 기념하며 '샌디에고 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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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국가보훈처 보비스 선포 9주년을 기념하며 '샌디에고 에서 온 편지'
  • 승인 2016.08.0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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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2006년 11월 1일 입사)

 

“원호청이요? 내래 종로사는 OO인데 나처럼 혼자 사는 늙은이가 겨울동안 잠깐만

 

 
 
신세질 시설 없갔소?”

 

2007년 12월 끝자락 유난히도 매서웠던 겨울 어느날 85세 된 순직군경유족 할머님의 전화를 한통 받았다. 그 당시 우리 서울북부보훈지청 재가서비스 대상자는 약 80명 남짓이었고 관할구역인 7개구 가운데 종로에는 단 한분의 대상자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상담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할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님은 이북이 고향이고 혈혈단신 종로에 정착해 두 딸을 키워냈으나 모두 장성해 해외로 나가버렸고 큰딸은 독일에서 30년 전 사망, 둘째딸은 미국시민권자로 수년에 한 번씩 볼 따름이라 하셨다.

할머님은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일본식 다다미집에 살고 계신데 연탄보일러가 있어도 연탄 들어 옮길 기운이 없어 전기장판과 난로로 추운겨울을 버티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서울 한복판 아직도 연탄보일러가 있구나 싶고 이렇게 추운겨울 팔순을 훌쩍 넘은 어르신이 큰일 치르겠다 싶어 단기보호시설을 안내해드렸다.

 

그런데 할머님은 절대 종로구를 벗어날 수 없다고 고집하셨다. 대상포진을 앓고 있어 만성통증으로 몸도 괴롭고 오래 살 것 같지도 않은데 삶의 유일한 낙이 근처 성당에 나가는 것이니 서울관내도 안되고 반드시 종로구에 소재한 시설만 갈수 있다고 하시며 마땅한 시설이 없다면 충분히 사례할테니 2~3개월 머물 임대주택을 소개해 줄 수 없느냐는 부탁까지 하셨다.

 

난감하게도 종로구에는 단기보호시설로 등록된 시설도 없고 방법도 없었다. 당시엔 보훈섬김이가 8명뿐이라 한명을 매일 보내서 연탄을 갈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0분 넘게 통화를 하며 방법을 강구했지만 할머님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할머님을 찾아뵙고 상황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방법이 없으면 보훈섬김이라도 파견해드려야겠다 결심한 차였다.

 

할머님 댁은 약 11평 남짓 되는 일본식 2층 나무주택으로 비좁고 낡았으며 웃풍이 심하고 무척 추웠다. 안쪽에 달린 마당에는 석유곤로가 한 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그마하고 볼이 발그레한 할머님이 겨울옷을 몇 겹을 겹쳐 입고 두꺼운 솜이불 위에 앉아 계셨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할머님은 주 1회 구청도우미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안부도 확인하고 이런저런 심부름도 해주고 있어 재가서비스는 특별히 필요치 않다고 하셨다.

얘기하는 동안 할머님은 내손을 꼭 잡고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셨다. 결국 내가 해드린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할머님이 겨울을 잘 나시는지 몇 번의 안부전화를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듬해 봄 할머님께서 다시 전화를 주셨다.

“내래 보훈가족으로 보훈청에서 보훈섬김이를 파견받았으면 하는데, 구청에서도 사람을 보내주고 있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보훈청에서 보내주면 더 좋갔는데...어찌 안 되갔소?”

“어휴 왜 안되요. 어르신, 당장 보내드릴께요”

그렇지 않아도 항상 걱정되던 분이었는데 도와드릴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쁜 마음이었다. 할머님은 겨울 내 보훈복지사가 안부전화주고 걱정해 주는게 너무 고맙고 좋아 보훈청 보훈섬김이라면 정말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이렇게 할머님과 인연이 되어 2008년부터 보훈섬김이를 파견하게 되었다. 할머님은 특히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셨는데 가끔은 보고 싶은데 들를 수 없냐고 전화를 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쉽게 찾아뵐 여건이 안 되어 죄송해하면 할머님은 “아휴 정 선생 얼마나 바쁘갔어요, 신경 쓰지 말고 종로 지나갈때 편하게 꼭 한번 들르시라요”라며 오히려 바쁜 나를 챙겨주셨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러 갔을 때도 일정이 바빠 오래 머물지 못하는 걸 못내 서운해 하시며 두 손을 꼭 잡고 놓질 못하셨다. 그렇게 할머님은 내손 잡는 걸 좋아하셨고 반말하시는 법 없이 항상 깍듯이 "정 선생~정 선생~"하시며 존대는 물론, 믿고 의논할 상대로 생각해 주셨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했을때도 치료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나이들어 고통스럽게 치료받으며 남은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고 고민을 털어놓으시며 아무런 도움도 못 드리는 내게 "정 선생한테 얘기를 하고 나니 안심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이렇게 늙은이 얘기 들어주고 같이 걱정해줘서 고마워요"라고 하셨다.

할머님은 보훈섬김이 선생님께도 성당지인들께도 단골 복어 집 모녀에게도 사랑받는...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한없이 애정을 갖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결국 금년 2월 딸과 사위가 급히 연락받고 한국에 들어온지 일주일 만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님의 임종소식을 듣고 한동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미국으로부터 카드가 한 장이 배달되었다.

"정인숙 님께

저의 어머님 살아생전에도 늘 가까이에서 아주 친절히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어머님께서도 늘 감사해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즐거워하며 함께 축하드립니다. 정인숙님 가정에도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늘 풍성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부활절에 샌디에고에서...OOO, OOO 드립니다."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출국 전, 보훈청에 찾아와 "평소에 어머니와 통화할때 마다 보훈섬김이와 보훈복지사가 잘 챙겨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안심시키셨어요" 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던 둘째 따님과 사위분이 보낸 카드였다. 카드를 읽고 "정 선생~ 또 놀러 와요" 하시며 반갑게 내손을 꼭 잡고 놓지 못하셨던 할머님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고 그 다정했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할머님께 드린 마음보다 할머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 더 컸기에 그 소중한 마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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