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문제열의 窓] 내 고향 김포는요
상태바
[문제열의 窓] 내 고향 김포는요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4.02.08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나는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한강 변의 아주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고향은 그리 높지 않은 자그마한 산자락에 40채의 집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동네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지만,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정이 듬뿍 묻어나는 착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마음 부자’ 동네였다. 봄이 되면 앞산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뤘다. 모낸 논에는 뜸부기가 ‘뜸북뜸북’ 노래 부르고, 하얀 예쁜 황새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우렁이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강남 갔던 제비도 찾아와 추녀 밑에 둥지를 틀며 새끼를 늘린다. 조용한 동네에 온갖 새들이 모여 장사진을 이룬다.

차도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길의 절반은 논두렁길에 벌판이었다. 나머지는 구불구불 낮은 산길에다 포장되지 않은 마차 바퀴에 골이 움푹 패인 울퉁불퉁한 길이다. 겨울에는 눈이 쌓여 얼어붙고, 봄이 되면 겨울 동안 얼어붙은 길이 녹아 늘 바지 밑자락에 붉은 질흙이 묻었다. 또 신발이 자주 벗겨져 양말까지 버리기 일쑤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늘 질퍼덕거렸다. 자전거가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자전거 바퀴에 진흙이 끼면 너무 힘들어 차라리 걷는 것이 나았다. 코 흘리며 빡빡머리에 꿈 많던 어린 시절.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이 길을 매일 힘든지도 모르고 걸었다.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하얀 교복 깃을 나풀거리며 좁은 논두렁길과 구불구불한 민둥산을 지나가는 모습은 동화 같았다.

동네에서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마을회관에 모여 윷놀이를 했다. 집집이 윷놀이 표를 사서 일주일 이상 윷놀이를 즐겼다. 상품은 1등 쟁기, 2등 양은솥, 3등 주전자, 4등 삽, 5등 복조리였다. 찬조금을 내면 이름과 금액을 표시한 종이를 새끼줄에 붙여 명예를 높여준다. 동네에서는 돼지를 잡고 부녀회에서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한다. 이때는 얘 어른 할 것 없이 잔치다. 그 시절 최고 인기는 먹으면서 노는 윷놀이였다. 

고향에 대한 추억 가운데는 부모님에 대한 것들이 많다. 당시는 전자시계가 없던 시절이라 시간을 잘 알 수 없었다. 머리맡에 온 집안 식구가 함께 듣는 전기 라디오가 있었다. 시간을 알려고 켜는 순간 찌릿한 전기에 감전되는 일이 많아 마음대로 켜지도 못했다.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간이 가장 정확했다. 두 분은 새벽부터 바쁘셨다. 아버지는 방에 불을 지피며 돼지와 소죽을 끊이신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짓고 다섯 자식의 도시락을 싸셨다. 지금처럼 밥을 담는 그릇과 반찬을 담는 그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도시락 안에 반찬 칸이 있어 그곳에 김치와 깎두기, 무말랭이 등을 넣는다. 이따금 멸치볶음과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놓아주면 기분 좋은 날이다. 

도시락을 반듯이 넣어야 하는데 책가방이 적어 옆으로 넣고 가다 보니 반찬 국물이 흘러 가방과 책에 벌겋게 스며드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도 점심 도시락을 못 싸 오는 학생들도 꽤 있었던 시절이라 도시락을 갖고 온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당시는 쌀이 부족해 보리 등 여러 잡곡과 밀가루를 섞어 먹던 혼분식장려운동(混粉食獎勵運動)이 정부의 중요한 정책지표였다. 점심시간이 돌아오면 선생님께서 도시락에 보리를 30% 이상 넣었는지를 검사하고 합격해야 밥을 먹었다. 

학교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매일 매일 목과 손에 때 검사를 하던 일. 여학생에게는 머리의 이를 검사 하던 일. 네모난 옥수수빵과 우유 한 컵을 배급받아 먹던 일. 조금이라도 큰 빵 조각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던 마음. 겨울철 교실 난로의 불 쏘시지를 준비하기 위해 뒷동산에 올라 솔방울을 줍던 일. 매주 월요일에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모여 애국가 제창과 국민교육헌장 낭독,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꿈과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끝이 안 보였던 김포평야와 한강도, 드넓었던 학교 운동장도 이젠 너무 초라하게 하게 보인다. 고래 등 같았던 기와집, 방앗간, 신기했던 양계장, 새끼공장, 국수공장 등은 모두 사라졌다. 동네 앞의 논과 밭은 메꿔져 고급 전원주택이 꽉 들어차 있다. 읍소재지는 천지개벽해 아파트 숲을 이루면서 제비도 찾아 들지 않는 동네가 되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다는 현제명의 고향 생각이란 노래를 읇조리다 보니 더욱더 옛 모습이 그리워진다. 뛰놀던 내 동무들에게 오랜만에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다.

[전국매일신문]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