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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맞은 5·18암매장 흔적 못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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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맞은 5·18암매장 흔적 못 찾아
  • 호남취재본부/ 서길원기자
  • 승인 2017.12.03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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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교도소 의심지역 곳곳에서 땅 파고 되메운 흔적만 나와
5·18단체 “조직적으로 증거 없앤 듯…정부 진상규명위원회 필요성 확인”

    옛 광주교도소 5·18 암매장 의심지역 발굴조사가 법무부 최종 승인 이후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간 지 3일 한 달째를 맞았다.

    문화재 출토방식으로 이뤄진 발굴조사를 통해 땅을 파내고 되메운 흔적만 드러났는데, 5·18 당시 사라진 사람들 행방을 증언해줄 핵심 목격자의 양심 고백과 정부 차원 진상규명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구속자회·구속부상자외)가 주도한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교도소 5·18 암매장 추정지 발굴조사는 이날까지 별다른 성과 없이 한 달간 이어졌다.

    재단 등은 1995년 5월 29일자 서울지방검찰청 '12·12 및 5·18 사건' 조사자료를 토대로 5·18 당시 3공수여단 등 계엄군 병력이 주둔했던 옛 교도소를 암매장지로 지목했다.

    광주교도소는 2015년 10월 문흥동에서 북구 삼각동으로 이전했는데 보안·수용 시설이라는 특성상 지난 37년간 암매장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980년 5월 현장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됐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재단은 3공수 본부대대 소령 계급 지휘관으로 광주에 투입된 김모씨가 검찰 조사 때 남긴 약도를 단서 삼아 고고학 분야 연구기관인 대한문화재연구원과 옛 교도소 북쪽 담장 주변에서 문화재 출토방식으로 땅파기를 시작했다.


    암매장을 역순으로 재현하고자 택한 방식이었는데 지난달 6일 첫 삽을 뜬지 약 2시간 만에 지표면으로부터 20여㎝ 깊이에서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배관 줄기가 드러났다.

    5·18단체로서는 약도 작성자를 발굴현장으로 소환할 법적 구속력이 없어 작업반경을 확대하며 조사를 지속했지만, 배관 즐기는 최대 1m 깊이까지 모두 9개로 늘어났다. 빵이나 조미료 포장지 등 생활 쓰레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던 5·18단체는 전문업체 도움을 받아 옛 교도소 일원과 전남 화순 너릿재 등 또 다른 암매장 의심지역에 땅속탐사레이더(GPR)를 투입했다.

    GPR 이상 징후가 나타난 옛 교도소 남쪽 담장 주변 소나무숲 등지를 지난달 28∼29일 조사했는데 앞서 결과와 마찬가지로 5·18 행방불명자 유해나 소지품 등 암매장 흔적 대신 과거 굴착 이력만 나왔다.

    너릿재 일원은 터널 주변 땅속 60㎝ 깊이에서 의심물체가 탐지됐으나 광주-화순을 잇는 간선도로망에 속해 발굴 착수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암매장 발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3공수 출신 계엄군 관계자들이 제보자로 나서는 등 새로운 단서도 등장했다.

    교도소 4개 감시탑 가운데 남서·북서쪽 두 곳 주변,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서쪽 담장 일원, 북쪽 담장 밖 테니스장 근처가 발굴 조사할 가치가 있는 장소들로 새롭게 떠올랐다.

    다만, 제보자들은 암매장에 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정황만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재단은 해당 장소에서 추가 GPR 조사를 준비하는 등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재단과 5월 단체는 옛 교도소 발굴이 최종적으로 성과 없이 끝난다면 1980년 항쟁 직후 암매장 흔적 훼손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판단은 7공수가 6월 중순까지 광주에 머물렀고, 11공수는 항쟁 직후 서울로 떠났다가 일반인 또는 보병 복장으로 광주에 돌아왔다는 증언과 관련 있다.


    재단은 '공수부대 지휘부가 1980년 5월 27일 이후 암매장 관련 내용을 신고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관계자 증언 기록을 토대로 광주에 잔류·복귀한 병력이 암매장 흔적을 없앴을 것으로 본다.

    계엄군이 5·18 희생자 암매장뿐만 아니라 사후 증거 인멸까지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행했을 것이라는 분석인데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당사자 증언이나 핵심 기록이 나와야만 한다.

    재단은 5·18 당시 광주에서 중장비를 운용했던 야전공병단, 옛 교도소에 3공수 대체 병력으로 투입됐던 20사단 등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계엄군 부대 작전·상황일지 확보 또한 주력하고 있다.

    정수만 5·18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남미의 경우를 보더라도 군부독재 정권에 암매장당한 시민의 시신을 발굴할 때 핵심 당사자들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가족들이 뼛조각이라도 거둘 수 있게 이제는 진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양심 고백을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양래 5·18재단 상임이사는 "분명 그곳에 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장에 한 번 불러서 이야기를 들을 수조차 없는 게 지금 5·18 진상규명이 마주한 현실"이라며 "법적 강제력을 지닌 정부위원회가 왜 필요한지 교도소 발굴 상황이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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