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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원도심 역사성·장소성' 주제발표·종합토론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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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원도심 역사성·장소성' 주제발표·종합토론 진행
  • 인천/ 정원근기자
  • 승인 2023.09.0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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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인천시민 포럼 주최...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이승만과 인천' 등 주제발표
’인천 원도심 역사성·장소성‘ 포럼.
’인천 원도심 역사성·장소성‘ 포럼.

도시재생 인천시민 포럼은 전날 인천 중구청 월디관 4층 대회의실에서 각계인사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물포 르네상스 성공을 위한 ’인천 원도심 역사성·장소성‘ 주제발표 및 종합토론이 이어졌다고 5일 밝혔다.

이날 주제발표 및 종합토론에서 ▲개항장(자유공원, 근대사 박물관, 근대 건축물, 김구 백범로)을 비롯 ▲내리교회(제물포 순례길, 영화초등학교, 아펜젤러 공원) ▲이민사박물관 ▲월미도(전승기념비, 한미동맹 기념공간) ▲인하대학교(이승만 기념관) 등의 역사성・장소성이 주 무대로 거론됐다.

먼저 자유통일을 위한 국가 대개조 네트워크 사회문화예술분과장을 맡고 있는 류석춘 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승만연구원 초대 원장)는 ’이승만과 인천‘ 주제발표를 통해 1875년 3월 황해도 평산에서 몰락한 왕손 집안으로 태어난 이승만은 두 살이 돼 서울 남대문 밖 도동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서당교육을 받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16살이던 1891년 박씨 부인과 결혼했다고 소개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 4월 신학문을 배우러‘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다니며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이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오늘날 거리집회에 해당하는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인기를 끌었다.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1899년 1월 투옥됐다.

감옥 생활을 하며 이승만은 후에 책으로 출판할 ‘청일전기’ ‘독립정신’ 등의 원고를 한글로 완성했다. 옥중에서 또한 ‘제국신문’ ‘신학월보’ 등에 활발히 기고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류석춘 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주제발표.

감옥을 나온 이승만은 당시 실력자 민영환 등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출국했다. T 루즈벨트 대통령 여름 별장을 찾아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나, ‘외교적 거절’에 만족해야 했다. 미리 받아 둔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활용해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톤’대학에 진학해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각기 취득했다.

조선에 돌아온 이승만은 기독청년회(YMCA) 일을 맡았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돼 1912년 3월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5월 미니아폴리스 ‘세계감리교 연차총회’참석이 핑계였다. 도미한 이승만은 뉴저지주지사가 된 은사 ‘우드로 윌슨’의 자택을 찾아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미국 각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했다.

‘한인기숙학교’를 세운 후 ‘한인중앙학원’, ‘한인여자학원’, ‘한인기독학원’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교육을 확장했고, 1913년에는 ‘태평양잡지’도 창간했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일본의 검거를 피해 시체를 옮기는 화물선 관 속에 숨어 호놀룰루를 출발, 상해로 밀항했다.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좌우대립은 물론, 자금 확보와 용처 등에 관한 갈등으로 5개월 만에 ‘고별교서’를 발표하고 하와이로 돌아갔다.

하와이로 복귀하자마자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대한인동지회’를 결성,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와 경쟁했다. 동시에 워싱톤DC 군축회의에 참석,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925년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탄핵했지만, 임시정부와 관계를 복원한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가서 ‘만주의 한인들’(Koreans in Manchuria)이란 소책자를 배포하면서 독립을 호소했다. 제네바에서 만난 프란체스카와 1934년 10월 뉴욕에서 재혼하고 하와이로 귀환했다.

워싱톤DC에서 집필한 책 ‘Japan Inside Out’을 1941년 여름 출판하면서,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1942년 6월부터 ‘미국의소리’ 방송에 출연해 동포들의 대일투쟁을 고무했고, 같은 해 9월부터는 CIA 전신인 OSS와 협의해 국내 진공에 대비한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교육에 돌입했으나, 일본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무위에 그쳤다.

환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남노당 박헌영과 대립했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소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공동위원회를 추진하면서, 미군정은 좌・우합작 노선의 여운형·김규식을 지원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반대는 물론, 반공노선으로 뭉친 이승만·김구의 반대로 좌절했다.

때맞춰 시작된 미소 간의 냉전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UN의 결정으로 넘기도록 만들었고, 국제정치의 챔피언 이승만은 이 기회를 활용해 주도권을 행사하며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다.

친일청산, 농지개혁 등 건국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다 6.25 기습남침을 당했다. 미국 등 UN의 도움을 얻어 나라를 지켰고,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관철시켰다. 교육기회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으며, 1950년대 전후복구를 통해 1960년대의 비약을 예비했다.

측근이 주도한 3.15 부정선거에 책임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하야 후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며 찾았던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결국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임종을 맞았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류 교수는 “이승만과 인천의 인연 4가지에 대해 첫째로 인천 ‘내리교회’를 설립하고 운영한 감리교회 및 선교사들과의 인연, 둘째로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발한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하와이 교포사회와의 인연, 세째로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인천을 산업화의 거점도시로 발전 주도, 마지막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맥아더 원수와의 인연은 6.25 남침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인천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개인적 친분은 물론, 공유하는 이념 즉, 자유와 반공이 꽃핀 장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국매일신문] 인천/ 정원근기자 
wk-ok@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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