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돈 백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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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돈 백만 원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4.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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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돈 백만 원이 생겼다. 돈 백만 원이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여름 벼농사와 겨울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으면서 알뜰히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든 것이다. 백만 원이 묶인 돈 뭉치를 보고 있노라니 여느 돈과는 달리 세종대왕님 용안이 환하게 보였다. 백만 원을 은행에 예금하려 생각하니 공과금 내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통장에 있는 백만 원보다 소유하고 있는 현금 백만 원의 뿌듯함을 느껴서 집에다 보관하기로 했다.

외출을 하자니 집의 돈이 걱정이 됐고, 집안에 앉아서도 방범창의 부실함을 걱정했다. 도둑이 거들 떠 보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집구석에 앉아서 들이닥치지도 않을 도둑을 염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생각다 못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여름 운동복 주머니에 휴대폰 늘어진 것처럼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소유한 자의 불편함을 처음 느껴보았다.

돈 백만 원이 끼치는 불편함이 커 집안에 물건 하나 들여놓는 것으로 백만 원을 없애기로 했는데 문제가 불거졌다. 세탁기가 탈수가 안 되어서 가끔 짜증을 내던 아내가 생각나서 세탁기를 교체하려 했더니, 세탁기란 놈이 빙글빙글 웃다가는 세탁물의 물기를 쫙 뽑아내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화면이 고르지 않고 흐렸었는데, 바꾸려고 화면을 보니 하늘의 파란색이 애국가에 나오는 ‘공활한 가을 하늘’보다도 더 새파랗게 비치었다. 주방에 바꿀 물건이 있나 기웃하고 보니, 가스레인지는 파란 불꽃을 날름거리며 놀리고, 전자레인지는 나 멀쩡하니 신경 끄라고 소리 윙윙 지르지, 식기건조기는 작은 불빛을 껌벅이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혹시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졸고 있던 냉장고가 놀라서 불을 번쩍켜며 어서 문 닫으라고 냉기를 쏘아서 기겁을 하고 문을 닫았다.

돈 백만 원의 사용처를 찾아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아내 옷 한 벌 사주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옷 한 벌 사주겠다는 말을 들은 아내는 항시 가을 억새같이 뻣뻣했던 태도가 봄날 새순처럼 부드러워졌다. 돈 백만 원의 사용처를 이제야 제대로 잡은 것이다. 의류매장을 찾았다. 옷을 고르던 아내가 옷 하나를 골라 걸치고서는 입이 귀에 걸렸다. 아내는 입으라고 사 온 옷을 입지는 않고 몇 번이며 장롱에서 꺼내보며, 자린고비가 밥상위에 매달린 굴비 보듯 했다.

어느 날 드디어 그 새 옷을 입을 기회가 생겼다. 부부동반 모임 초청장이 왔다. 그날 아내가 사온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면 날씨가 추워야하는데, 이때를 기다리 듯 날씨 또한 엄청 추웠다. 아내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데, 이 추운 날씨야말로 아내에게는 꽃 피는 춘삼월 소풍날처럼 느껴졌으리라. 모임시간이 어두운 저녁 시간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금의야행(錦衣夜行)을 했다.

몇 달 전 야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 만나기를 몇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 인사 나누듯 하며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인사를 하느라 모인 사람들을 일일이 누볐지만, 실은 옷을 자랑하고픈 마음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누구하나 옷에 대해서 얘기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자 아내는 풀 빠진 옷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갔는데 좌중의 한사람이, 돈이 조금 생겼기에 오늘의 술값은 자기가 내는 것이니 많이 들라고 말하였다. 농지를 샀다 팔아서 차익을 남겼는데, 뭐? 미등기 전매라나? 뭐라나. 그때 남긴 차액이 몇 푼 된다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 몇 푼이 몇 억이라는 것을 알아듣고는 음식을 먹던 입이 딱 벌어졌다.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땅에서 일 년에 두 번 농사를 지어 몇 푼이 생겼다고 여유를 부렸는데, 저녁 값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땅을 일 년에 두 번 거래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 큰돈을 벌고도 몇 푼이 되지 않는다고 가볍게 말하는데, 다음에는 더 큰 건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부부가 여유를 부렸던 돈 백 만원이 세상에서는 하찮은 잔돈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가 길에 아내는 두꺼운 옷을 걸쳤음에도 추운지 짧은 허리를 구부리고 아무 말 없이 밤길을 걸었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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