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나 가족 사이의 말은 사적(私的) 영역이다. 신문 방송 등이 품어내는 말과 글, 이미지와 이에 따른 반응은 공공(公共)의 현상이다. 유명 인사들의 SNS나, 방송보다 요즘 뜨겁다는 유튜브 채널도 일반 시민과의 소통(疏通)을 염두에 둔 것이면 공적(公的) 영역에 넣어야 한다.
‘공공의 영역’에서는 의도나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 책임이 따른다. 개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처신(處身)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처신의 處자는 함축하는 바가 크고, 상징적이다. 그래서 뜻이 좀 어정쩡하기도 하다. 그림이 글자가 된 한자(漢字)는 한 글자가 한 단어다.
인터넷미디어 종사자들이나 단기필마(單騎匹馬)로 깃발 날리는 뉴미디어의 ‘기수’들은 실질적인 언론인이다. 커뮤니케이터라는 용어(用語)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개 젊다. 요즘 이들의 언어에서 특이한 현상이 관찰된다. ‘기자회견을 자처하다’는 말이 유행처럼 퍼진다.
스스로 自와 처신 할 때의 處, 자처(自處)가 이렇게 쓰인다. 기껏 한 끗 또는 반 끗 차이니 말하는 측이나 말 듣는 측이 대충 알아들으면 되리라 생각했을까?
자청(自請·자기가 하겠다고 나섬)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잘 못 놓인 것이다. 자처와 자청은 비슷한 말이 아니다. 여러 끗 차이나는 말이다. 오용(誤用)의 사례다.
언어의 선택에는 신중함이 미덕이다. 대충 지르는 것은 수용자(독자 시청자)에 대한 실례이며, 제 스스로의 신용을 깎는 태도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커가면서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들의 연애와 관련한 얘기, 심지어 범죄 불륜 따위도 때로 ‘기자회견’의 주제가 된다. 시쳇말처럼, 게나 고둥이나 다 나서서 기자들 불러 모아 나 좀 봐라 하는 세상이라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일’이 사적인 일, 프라이버시라며 제 얘기만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청해 기자 불러 한 얘기는 이미 공공의 일이다.
자처는 스스로 (자기를) 어떤 사람인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어법상으로 말하자면 “나는 기자회견입니다‘라는 엉터리 말이 된다. 그런데 또 하나 더 주의할 대목이 있다.
자처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자살(自殺)의 뜻이기도 하다. 처형(處刑)이라 할 때의 ‘처’의 용법이다. 자진(自盡) 자폐(自斃)도 같은 말이다. 이 말을 조심해서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바른 행동의 처신도 중요하다. 또 이를 제대로 표현하는 말글도 그 처신의 하나다.
處의 옛 글자(그림)은 책상에 걸터앉은 사람의 모양이다. 바르게 앉아야 한다. 어디에, 어떤 장소나 상황에 놓여있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폭넓게 유추(類推)할 수 있게 하는 원래의 의미다.
영어권 사람들 어휘퀴즈에 자주 나오는 두 단어의 해설에도 늘 이 ‘교훈’이 따른다. vicinity[비씨너티]와 vicious[비셔스], 한 끗 차이 철자이니 비슷한 뜻일까? 전자는 ‘부근, 언저리’이고 후자는 ‘악독하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대충 가까운(부근) 뜻이라고 철자를 잘 못 쓰면 큰 코 다친다는 뜻으로 그 동네 교육 현장에서도 잘 쓰는 예문이다. 말(의 쓰임)은, 특히 공공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해야 한다는 얘기에 들어가는 삽화(揷話·에피소드)다.
더위(暑)에 걸터앉은 시기(절기)의 이름 처서(處暑)는 실제로는 가을의 청량(淸涼)을 예고한다. 더위는 간다, 이제 코로나-19도 갈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