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강상헌의 하제별곡] 게나 고둥이나 기자회견을 자처한다고요?
상태바
[강상헌의 하제별곡] 게나 고둥이나 기자회견을 자처한다고요?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8.24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친구나 가족 사이의 말은 사적(私的) 영역이다. 신문 방송 등이 품어내는 말과 글, 이미지와 이에 따른 반응은 공공(公共)의 현상이다. 유명 인사들의 SNS나, 방송보다 요즘 뜨겁다는 유튜브 채널도 일반 시민과의 소통(疏通)을 염두에 둔 것이면 공적(公的) 영역에 넣어야 한다.

‘공공의 영역’에서는 의도나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 책임이 따른다. 개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처신(處身)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처신의 處자는 함축하는 바가 크고, 상징적이다. 그래서 뜻이 좀 어정쩡하기도 하다. 그림이 글자가 된 한자(漢字)는 한 글자가 한 단어다.

인터넷미디어 종사자들이나 단기필마(單騎匹馬)로 깃발 날리는 뉴미디어의 ‘기수’들은 실질적인 언론인이다. 커뮤니케이터라는 용어(用語)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개 젊다. 요즘 이들의 언어에서 특이한 현상이 관찰된다. ‘기자회견을 자처하다’는 말이 유행처럼 퍼진다.

스스로 自와 처신 할 때의 處, 자처(自處)가 이렇게 쓰인다. 기껏 한 끗 또는 반 끗 차이니 말하는 측이나 말 듣는 측이 대충 알아들으면 되리라 생각했을까?

자청(自請·자기가 하겠다고 나섬)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잘 못 놓인 것이다. 자처와 자청은 비슷한 말이 아니다. 여러 끗 차이나는 말이다. 오용(誤用)의 사례다.

언어의 선택에는 신중함이 미덕이다. 대충 지르는 것은 수용자(독자 시청자)에 대한 실례이며, 제 스스로의 신용을 깎는 태도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커가면서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들의 연애와 관련한 얘기, 심지어 범죄 불륜 따위도 때로 ‘기자회견’의 주제가 된다. 시쳇말처럼, 게나 고둥이나 다 나서서 기자들 불러 모아 나 좀 봐라 하는 세상이라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일’이 사적인 일, 프라이버시라며 제 얘기만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청해 기자 불러 한 얘기는 이미 공공의 일이다.

자처는 스스로 (자기를) 어떤 사람인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어법상으로 말하자면 “나는 기자회견입니다‘라는 엉터리 말이 된다. 그런데 또 하나 더 주의할 대목이 있다.

자처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자살(自殺)의 뜻이기도 하다. 처형(處刑)이라 할 때의 ‘처’의 용법이다. 자진(自盡) 자폐(自斃)도 같은 말이다. 이 말을 조심해서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바른 행동의 처신도 중요하다. 또 이를 제대로 표현하는 말글도 그 처신의 하나다. 

處의 옛 글자(그림)은 책상에 걸터앉은 사람의 모양이다. 바르게 앉아야 한다. 어디에, 어떤 장소나 상황에 놓여있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폭넓게 유추(類推)할 수 있게 하는 원래의 의미다.

영어권 사람들 어휘퀴즈에 자주 나오는 두 단어의 해설에도 늘 이 ‘교훈’이 따른다. vicinity[비씨너티]와 vicious[비셔스], 한 끗 차이 철자이니 비슷한 뜻일까? 전자는 ‘부근, 언저리’이고 후자는 ‘악독하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대충 가까운(부근) 뜻이라고 철자를 잘 못 쓰면 큰 코 다친다는 뜻으로 그 동네 교육 현장에서도 잘 쓰는 예문이다. 말(의 쓰임)은, 특히 공공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해야 한다는 얘기에 들어가는 삽화(揷話·에피소드)다.  

더위(暑)에 걸터앉은 시기(절기)의 이름 처서(處暑)는 실제로는 가을의 청량(淸涼)을 예고한다. 더위는 간다, 이제 코로나-19도 갈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