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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詩 54] 국수 한 그릇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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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詩 54] 국수 한 그릇의 가르침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22.02.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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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고정희 시인(1948~1991년) 
전남 해남 출신으로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 

 
<함께 읽기> 한 일용직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파 길거리 한켠 포장마차로 들어간다. 집에 가본들 제대로 식사 챙겨줄 사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채워야 한다. 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후루룩 삼키며 탁배기 한 잔 더 청해 마신다. 안주는 국수 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뿐이다. 국수 한 사발, 탁배기 한 잔. 참 조촐한 밥상이고 술상이다. 필자는 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음식도 먹을 수도 있는데 단지 국수가 먹고 싶어서 먹을 뿐이지만, 노동자는 가장 싼 음식이라 국수를 먹는다. 허나 그의 밥상에 놓인 국수에는 신성함이 담겨 있다.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따뜻하게 솟아 나오는 김, 이 김으로 일용직 노동자의 언 몸, 피곤에 절은 몸, 배고픈 몸이 풀림을 시를 읽는 순간 느낀다. 또 뜨거운 국물과 섞이면 먹기 좋게 면이 풀어지듯이 노동자의 마음도 풀어지리라 믿는다.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힘든 노동의 허기를 채워주었음인가. 바닥까지 다 비운 국수 사발을 마치 경배하듯 하늘로 들어 올리는 행위엔 신성함마저 엿보인다. 거기에 국수 면발과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과 저녁연기의 하얀빛이 배경을 이루기에 마치 경건한 의식을 보는 듯하다.

“무량하여라 /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힘든 노동으로 지친 몸에 고작 한 그릇의 국수와 탁배기, 하지만 시인은 따뜻한 국수와 탁배기 한 사발을 겹쳐 그리면서 노동과 밥을 신성한 의식으로 만들어낸다. 국수 한 그릇의 가난함 속에 머무는 고요함과, 단순히 순명(順命)함으로 얻는 너그러움이 무량(無量)하다.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어스름이 몰려오는 황혼녘이다. 달빛 또한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일용직 노동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하는 이들의 한 끼 저녁 식사가 단순히 허기를 면하는 밥이 아니라, 달빛 가득함 속에 온 가족이 함께하는 따뜻한 식사가 되기를 잠시 기도한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3131@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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