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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충신과 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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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충신과 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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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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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미래정책포럼 상임대표

조선 말기 때 무과에 급제한 무신(武臣) 이장렴(李章濂)은 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진무사(鎭撫使)가 됐다. 병인양요로 한때 함락되었던 강화부의 유수가 돼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859년(철종 10년)에는 황해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186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어 대원군의 군사 관련 부문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서북부의 수도 방어에 힘썼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원군과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대원군이 불우했던 시절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대원군이 집권한 후 국방에 필요한 재목이라 하여 구원(舊怨)을 잊고 중용하였다고 한다.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제26대 고종(高宗)의 아버지다. 이하응의 아들 명복(命福)이 12세에 제26대 고종으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됐다. 그런 이하응이 젊은 시절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 술집에서 추태를 부리자 종2품 무관 이장렴이 말렸다. 이에 화가 난 이하응이 소리쳤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 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하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다. 이장렴은 부름을 받자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들에게 유언까지 하고 갔다. 이장렴이 방에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이에 이장렴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이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장렴의 말에 흥선대원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 하더니 자기 무릎을 탁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좋은 인재를 하나 얻었군.” 그리고나서 흥선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하였다. “금위대장 나가시니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무장답게 목숨을 걸고 지조를 지킨 이장렴도 대단하지만 인재를 알아본 흥선대원군 또한 보통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신하와 주군을 보면서 나라가 바로 되려면 군주는 올바른 신하를 두어야 하고 신하는 소신을 가지고 군주를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쓴소리”는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반어적 항변도 아니다. 이장렴의 경우에서 보듯 소신과 충정이 뼛속까지 배인 자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이다. 

지금 여당이 된 국민의 힘도 야당이 된 더불어 민주당도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내홍에 시달리면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쓴소리가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난무하는 “당신 탓이라는 쓴소리”는 소신과 충정이 뼛속까지 배인 자의 가슴에서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쓴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살길과 이익을 찾아 생각나는 대로 뱉어내는 신소리, 흰소리일 뿐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제발 영혼 없는 입에 발린 신소리는 그만하고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영혼이 살아 꿈틀거리는 진짜 쓴소리를 해주길 모든 국민들이 바라고 있음을 잊지 마시라.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미래정책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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