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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조선판 코로나'로 떼죽음 당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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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조선판 코로나'로 떼죽음 당한 역사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2.05.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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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미래정책포럼 상임대표

​1432년(세종 14년) 4월 21~22일 세종대왕이 화들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마침 극심한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신음하자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토목·건설공사를 중단하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세종은 관리들이 제대로 환자들을 구호하는지 혹 생명이 위태로운 자가 있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한마디로 감찰단을 파견하여 관리들의 전염병 대책에 잘못이 있는지 낱낱이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격전(도교 주관의 제사 관장 부서)을 살피던 감찰단원의 보고가 세종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소격전 소속 여종 복덕은 시각 장애인인데,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복덕은 아이까지 안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세종은 소격전과 한성부 북부지역(북부령) 책임자 등 관리 2명을 문책하여 형조에서 심문하도록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石)을 하사했다. 세종의 지시는 일회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은 “복덕이 내가 내린 쌀을 다 먹은 뒤에는 또 굶을 것 아니냐”면서 “앞으로 복덕과 같은 백성은 그의 족친에게 맡기거나, 족친마저 없다면 해당 관청(소격전)이 끝까지 책임지고 구호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처럼 전염병과 같은 재난에 맞선 세종은 시쳇말로 ‘디테일 세종’ 소리를 들을만 했다. 건국초여서 제도가 확립되기 전인데다 워낙 명철한 성군이었기에 만기친람, 그 자체였다. 예컨대 1434년(세종 16년) 전국에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처방문까지 일일이 써서 전국에 내려주었다. “내가 의서에 써있는 처방과 약방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주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세종실록>

세종이 내린 처방문 중에는 별의별 요법이 다 등장한다. 그 중에는 발효시킨 콩씨와 불기운 받은 아궁이 흙, 그리고 어린아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처방이 있다. 세종은 또 “복숭아나무 가지 잎사귀와 백지(구릿대 뿌리 말린 약재), 백엽(측백나무 잎)을 찧어 가루를 내고 탕을 끓여 목욕을 하면 좋다”고도 했다. 이밖에 ‘복숭아 나무 속 벌레똥’을 가루로 곱게 갈아 물에 타먹는 것도 세종의 처방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 뿐인가. 세종은 요즘의 코로나 19와 같은 급성전염성 질환이 번질 때의 대비책도 빼놓지 않았다.

“급성전염병이가 도질 때 한 자리에 거처하는 경우에도 감염되지 않는 처방이 있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와 밤에 자리에 누울 때 참기름을 코 안에 바른다. 전염병 확산이 너무 빨라 약을 구할 수 없으면 급한대로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 하는 것이 좋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
세종은 전염병으로 죽을 처지에 빠진 백성들을 직접 구휼했다. 1434~35년 사이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백성이 3262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받고는 면포 5000필을 급히 나눠주었다. 1437년(세종 19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한성부 내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굶주린 자들의 무료급식소)마다 1000여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 두 곳에 집단수용 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세종 26년)에도 전염병이 휩쓸자 굶주린 백성들을 한 두 곳에 집단 수용하는 문제를 심사 숙고했다.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 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세종(재위 1418~1450)은 운이 억세게 좋은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임금들에 비해 전염병 창궐 횟수(5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전염병 발생횟수를 임금별로 보면 숙종 연간(재위 1674~1720)에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1724~1776·19회)와 현종(1659~1674·13회) 때가 뒤를 이었다. 전염병은 성종(재위 1469~1494·2회)까지 드문드문 했다가 연산군(재위 1494~1506·9회)부터 증가한다. 폭군의 시대에 하늘도 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든다. 

소빙하기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의 기온저하는 조선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였다. 중국의 경우 소빙하기가 절정을 이룬 17세기(명나라 말기) 기온이 지금보다 최하 1.5~2도도 떨어졌다는 연구도 있다. 이에따라 가뭄·홍수 등 기상이변이 빈발했다. 겨울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5~6월까지 서리와 눈이 내리기도 했다. 겨울추위가 혹독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겨울철인데도 갑자기 봄날처럼 따뜻해져 꽃이 피기도 했다. 기상이변은 굶주림과 위생불량을 낳았고, 이것은 곧 면역력의 저하를 부추겨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전염병 발병을 햇수로 따지면 320년에 달하고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는 연구가 있다. 전염병 기사는 1455건이나 된다. 가히 ‘전염병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염병 유행 빈도는 3월(12.3%), 2월(12%), 4월(10.4%) 등 봄철(34.7%)이 가장 많았다. 코로나19 사태가 겨울에 시작해서 봄철에 확산되는 추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구가 142만명이나 준 대기근, 전염병의 여파
특히 현종(13회)-숙종(25회)-영조(19회) 등이 전염병의 절정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현종-숙종 시대가 소빙하기가 극에 달한 17세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1670년(경술년·현종 11년)과 1671년(신해년·현종 12년)에 걸쳐 조선을 덮친 이른바 ‘경신대기근’과, 1695년(을해년·숙종 21년)과 1696년(병자년·숙종 22년) 시작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세계를 강타한 이상저온이 조선에도 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가 이어졌다. 현종은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이냐”(‘현종실록’ 1670년 5월)고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숙종실록’은 1678년(숙종 4년) 9월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1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25년 뒤인 1695(을해년)~96년(병자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을병대기근’은 가뜩이나 도탄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을병대기근’으로만 140만명이 넘는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호수는 129만 3083호이고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호수로는 25만 3391호가, 인구로는 141만 6274명이 각각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기근과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미래정책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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