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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갑골문 사람들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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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갑골문 사람들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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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0.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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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메뚜기 들판의 추상(秋霜) 추파(秋波) 추호(秋毫) 

아스팔트길이 없었던 들판의 옛 사람들에게 가을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화순 고인돌 군락 언덕에 서서 갈대와 들꽃의 춤을 바라보며 옛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생각한다.

결실의 가을, 저 황금 들녘은 벼의 파도다. 벼 화(禾)가 불 화(火)가 만난 글자 가을 추(秋)는 수확(收穫)의 이미지를 품었겠다. 쌀이 되는 벼와 세상 변역(變易)의 핵심인 불이 만나다. 

무슨 명상을 줄까. 시인이며 화가인 당신은 이 가을을 어떤 모습의 서정(抒情)으로 떠올릴까? 갈대숲에서는 그때 어떤 화음이 흘렀을까? 

당신 마음속의 시인은 이 그림에서 어떤 감흥을 얻었을까? 편익(便益)의 영리함을 배우기 전 우리의 아기들은 이 가을을 어떻게 그릴까? 그림이 글자가 되는 갑골문의 세계는 이렇게 시(詩)의 충만(充滿)이다. 

저 禾자의 원래 모습(갑골문)은 메뚜기의 그림이었다. 메뚜기 잡아 구워먹던 모습일까? 

그 메뚜기가 오래 도안(圖案 디자인)의 과정을 거치며 다듬어졌다. 벼와 불, 메뚜기와 불의 조합을 물질의 각축(角逐)이나 물리적 변화로 보지 말 것. 섭리의 화학(化學)으로 살필 일이다. 변덕이라고도 부르는 우리 마음의 변화무쌍과 비교할 만하다. 

그 가을을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소비(활용) 했을까? 가을 서리 추상(秋霜), 아름다운 여인의 요염한 곁눈질 추파(秋波)는 서늘함을 담았다. 그 온도 속의 뜻도 차가웠을까?     

첫 서릿발은 정서적으로 그렇듯 여름을 지낸 채소에게는 우박처럼 치명적이다. 秋霜같은 심판(審判)은 우리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마약과 마약범들에게 마땅하다. 

추호(秋毫)의 용서도 없이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가을의 터럭이란 뜻인 秋毫의 효용이다. 가을이 오면 동물들은 털갈이를 한다. 새 털이 그렇게 가늘까. 비유의 언어는 무심한 듯 인간의 의지를 품는다. 

든든하고도 어진,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 속에 마약의 악마가 담겼더란 말인가? 피의자(被疑者)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 배우, 어리석게도 그 거죽만 보고 우리는 그를 그리 좋아했던가? 

전쟁만큼 슬픈 인간사를, 그 무대 뒤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청정함의 기쁨이 우리의 착각이고 거짓이었다니. 물질(문명)의 마지막 악장, 그 퇴영(退嬰)의 다음은 의당 멸망일 터다. 어찌 그 악마를 秋毫라도 용납하랴!

우리 종교인 원불교 경전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는 동아시아의 철리(哲理)인 주역(周易)이나 우리 땅의 철학 정역(正易)의 易 즉 바뀜과 흐름을 표현한 것이겠다. 날마다 바꾸고, 그 바꿈마저 ‘참’이라 고집하지 않는 것이 비로소 바른 易이 아닌가.

그 개벽(開闢)은 인류 문명에 秋霜같은 철퇴가 되어라. 가을의 기운은 에디뜨 피아프의 ‘고엽(枯葉)’과 같은 달콤한 고독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그 나른함이 급기야 수천 명 살과 뼈를 찢고 마음을 으깨는 전쟁으로 바뀌었을까.

생각도 기계에 맡긴 소위 문명, 그를 맹종(盲從)하는 서구와 아시아의 일본 같은 ‘기계주의’ 세력은 추상같은 포화(砲火)의 지옥에서 멸망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어디 있느냐? 본디를 잃고, (본전 생각에) 날마다 빤한 거짓 펴는 족속들과 같은 하늘을 지고 살기는 참 부담스럽다. 

메뚜기 날고뛰던 고인돌 들판의 첫 인간을 돌아보라. 당신 아이와 손자의 첫 눈망울에서 그 마음에 들어가 볼 수 있(었)으리. 인간은, 증오도 마약도 없던 그 가을을 회복할 일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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