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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그해 설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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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그해 설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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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26 10: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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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지금은 많이 쓰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엔 구정(舊正)이라고도 불렀다. 올해도 코로나19로 온 가족이 모이긴 힘들 모양이다. 아쉬움이 커지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다 보니 옛 추억이 몇 가지 떠오른다.

설 명절 전에는 이것저것 챙기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한 달 전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많이 해 와야 한다. 솔잎이나 참나무 낙엽이 아닌 죽어 버린 굵은 오리나무나 참나무, 소나무 등걸(그루터기;나무는 잘라 나가고 땅에 박힌 나무 밑동)을 해다가 마당 한 편에 수북하게 쌓아 놔야 한다. 그래야 어머니를 졸라 엿을 고아달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손님 접대를 위해 엿을 고아야 하셨을 어머니는 공부안하고 왜 나무해왔냐고 나무라지만, 내심 기뻐하셨다.

넉넉하게 감주를 해서 식혜로 쓸 것은 따로 덜어 광에 보관하고 가마솥 가득 감주물을 내려 밤새 뭉근한 불로 조려 가면서 엿을 곤다. 뽀얀 물이 갈색으로 변하고 점점 짙어지면서 마침내 점성이 생기기 시작하면 적당한 시점에 작은 단지에 퍼서 얼른 장독대로 옮겨 식힌다. 이것이 조청이다. 조청을 덜어내고 얼마간 더 졸이면 가마솥 한가운데서 공기 방울들이 왕방울만 하게 맺혔다 터지는데 마침내 엿이 다 고아진 것이다.

어머니는 쟁반에 콩가루를 깔고 엿을 얇게 펼쳐 놓는다. 워낙 뜨거워서 튀지 않도록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쟁반과 장독 뚜껑 등에 엿을 펼쳐 놓고 찬바람을 쏘인다. 엿이 식고 제법 꾸덕꾸덕해지면 작게 잘라 일일이 손으로 아주 얇게 펼친다. 콩가루를 묻혀서 엿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한 다음 엿 단지에 넣어 세배를 오는 친지나 이웃들에게 대접하곤 했다.

뻥튀기를 튀겨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뻥튀기 기계를 지게로 지고 다니는 사람이 설 명절 임박해서 마을에 나타나면 너도나도 쌀과 옥수수자루를 들고 한 손에는 작은 나뭇단을 가지고 나와 직접 불을 때면서 뻥튀기를 튀겼다.

우리 집은 정미소와 방앗간을 겸하다 보니 가래떡을 뽑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갓 뽑아낸 흰 가래떡은 조청을 찍어 먹지 않아도 그냥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헛간에서 굳히고 얼린 가래떡은 저녁에 온 식구가 달려들어 썰었다. 집에 있는 칼이란 칼은 모두 동원되고 도마와 그릇들도 방안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가래떡을 써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가래떡이 너무 굳으면 칼이 잘 먹히지 않고 너무 무르면 자꾸 달라붙는 통에 아예 썰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얇고 예쁘게 잘 썰지만 팔이 아파오기 시작하면 두께도 두꺼워지고 모양도 보기 싫어져서 어머니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대부분 떡국을 소고기로 끓이지만 우리 집은 장닭을 한 마리 잡아 육수를 내고 삶은 고기는 찢어서 양념을 한 다음 계란 지단과 함께 붉은 실고추, 참깨 등 고명을 올려 먹었다. 닭고기 특유의 맛과 담백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국물이 정말 일품이었다.

그믐날 저녁에는 목욕을 하고 일 년 묵은 때를 닦았다. 머리맡에 고운 때때옷. 평소 입기 어려운 새 옷은 설날이 되어야나 입었다. 김포공항시장에서 어머니께서 아껴두셨던 쌈짓돈으로 온 가족의 옷을 골고루 장만했다. 이런 귀중한 옷을 며칠 입지도 못하고 쥐불놀이를 하면서 태워먹기도 했다.

설날 아침은 떡국을 먹고 산소에 성묘를 갔다. 성묘 갈 때는 큰댁, 작은댁 식구들이 거의 모여서 함께 간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가기에 이산 저산이 하얀 학이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듯 보였다. 성묘를 마치고 가는 집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 세뱃돈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일 년 중 최고로 좋은 명절이었다. 저녁에는 늦도록 화투나 윷놀이를 하면서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보냈다.

이젠 집에서 엿을 고지 않는다. 당연히 조청 구경도 할 수 없다. 직접 튀긴 쌀 강냉이와 옥수수 강냉이 자루도 집안에서 찾을 수가 없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흑백사진 같은 설 풍속이지만 머릿속에는 아직도 곱게 색칠되어 남아 있는 설 풍속도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영면해 계신 호국원에 가서 어려웠지만 따뜻했던 그해 설 얘기를 나눠야겠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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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성 2022-01-26 12:05:55
세시풍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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