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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정의’는 뉘 것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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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정의’는 뉘 것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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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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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여야 바뀌니 ‘정의’ 바뀐다. 힘이 정의인가, 세상 모습 보니 정의가 힘이 아님은 분명하겠다. 온갖 아첨과 번복의 언어가 난무한다. 가치 뒤집힌다. ‘음주운전의 평가’도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대통령의 소리, 단연 전도(顚倒)된 정의의 절정이다.  

아, 저럴 수도 있구나. 바람개비 같은 그 모습들에, 하도 여러 번 속아본 서생(書生)의 새가슴이지만 또 서글프다. 다만 그 기발함과 가벼움을 경탄할 뿐. 

여(與)도 야(野)도, 노장(老將)도 소장파(少壯派)도, 선반 위 먼지 앉은 고리짝까지 모두 나서서 한 마디씩 정의론 편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나 대개 “밥 먹으면 배부르다.” 초딩 논리다.  

일리(一理) 있겠지만 그 속엔 일리(一利)의 노림수들 감췄으니 보편이나 지혜와는 거리 멀겠다. 내일은 없다, 제 코앞만 본다. 저 모리배(謀利輩) 정치는 조폭들도 ‘쩨쩨하다’ 비웃을 터.

저마다 먹고사니즘에 절실하리라. 그래서 모두가 ‘내가 옳다.’ 억지도 쓴다. 그 이끗의 정당성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권력에 엉켜 늘 단 꿀 빠니 희망이 족할까. 인생은 금방 마감이니, 아니 놀고 어이리... ‘그들만의 리그’는 끝이 없다.

문자는 실존(實存)이다. ‘바를 정’이라고 쓰는 ‘正’자의 시원(始原)을 보자. 좀 시니컬하지만, ‘바름’과 正의 관계를 톺아보면 사물의 존재와 그 이름(제목)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된다.

우리말 ‘바르다’는 뜻이 正과 제대로 일치하지 않음을 유의할 것. ‘정의’는 一理 있지만 一利 즉 이끗 숨긴 뜻이라 놀부 마누라 되질처럼 야박하게 깎아 생각할 개념일세. 어원 공부다.

正의 제일 위 획(劃 一)은 네모의 아랫변이다. 간략하게 그려져 성(城)을 상징하는 한 줄이 됐다. 그 아래 止(지)는 흔히 ‘그치다’ ‘멈추다’ 뜻으로 쓰이나 원래 발의 모양으로 ‘가다’는 뜻이다. 갈 之(지)와 어원과 뜻이 같다.

(적의) 성을 향해 진군하는 군사들의 바쁜 발을 그린 그림이다. 보무(步武)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바르다’는 뜻으로 써온 正(의 속뜻)은 ‘내가 저 성벽을 깨부수고 점령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투에서 깨지면 국물도 없으리니, 그건 정의가 되다 마는 것이겠다.

‘이기면 정의, 지면 불의(不義)’인 것이다. 마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의 대구(對句)처럼 뜻도 딱 맞아 떨어진다. ‘이기는 삶’이란 캐치프레이즈가 이토록 천박한 실용주의적 요설(妖說)이었나. 정의는 다만 ‘내 정의’였던 것이다.  

문자 또는 언어가 가지는 신묘한 힘이라는 생각에 문득 두렵다. 경우에 따라 같은 죄인이 정의도 됐다가, 불의가 된다. 법(法)조차 그 칼자루는 사람이 쥐니 정의가 어찌 여일(如一)하거나 영원할까.  

그 정의는 보편성(普遍性)을 가져야 세상에 이롭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일리가 아닌, 공공(公共)의 이익을 보장하고 담보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공정(公正) 정도 단어가 어울리겠다.

‘정의’를 냉소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우리 ‘바른 마음’의 칼날을 벼리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저 무도(無道)함에 섞여 살다 함께 무도한 부덕소치 될라. 메멘토 모리, 죽음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내일을 예비하는 오늘이 귀중한 까닭이다. 

독야청청(獨也靑靑)이란 말 떠올린다. 청년은, 소나무처럼 청청하라. 다만 혼자라도...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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