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강상헌의 하제별곡] 참변(慘變)과 식자우환
상태바
[강상헌의 하제별곡] 참변(慘變)과 식자우환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2.11.08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자리’를 차지하면, 대개 제 스스로를 ‘뭔가 있는 존재’로 착각하게 되는 모양이다. ‘있어 보이는지’는 다른 문제다. 

인지상정인가. 이슈만 생겼다하면, 멋진 또는 멋있어 보이는 글귀 데려와 대인배(大人輩) 노릇하는 셀럽(유명인)들 특히 공직자들을, 존경해야 할까? 어쩌면 그런 행실 부추기는 서양문명의 총아(寵兒) SNS에 휘둘린, 덜 갈아진 먹물로 치부하고 용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가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장부’라는 글귀 들어간 게송(偈頌)을 이 시점, 참변의 소용돌이 속에 던졌다. 그는 청춘 3백여 명 사상(死傷)을 ‘강 건너 불’이라 할 처지가 아니다. 윤희근 경찰청장 얘기다. 경향신문의 보도를 읽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 있지만,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다. 지식의 존재 형식이 세상에 어떻게 비치는 지를 풍자한 말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 학식이 되레 근심을 불러온다는 말이다. 그 학식 가진 이는 자신을 존경할지라도, 세상이 그 학식을 존경할지는 장담 못하겠다. 識字는 ‘글자를 아는 것’으로도 읽자. 

콘텍스트(context)가 중요하다. 균형(balance 밸런스)으로 여겨도 된다. 전후관계나 맥락(脈絡)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생각의 지도(地圖)다. 그 지도의 완성도가 사람의 얼굴에 드러난다. 성형수술로도 이를 고칠 수 없다.

게송은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인간의 글이다. ‘부처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라는 구절을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라고 해석한 것이 적절한 지도 문제다. ‘내 의도’에 맞게 새겨진 뜻이 아닌지 하는 우려다. 적재적소(適材適所)를 따질 부분도 없지 않다.  

그 구절의 인용이 ‘나’를 (대)장부 또는 거물로 바라보는 심리의 (우연한) 표출(表出)이 아닌지도 짐작한다. 겸양(謙讓)의 내려놓음(下心 하심)이 때로 오만(傲慢)의 모양으로 비칠 수 있는 것임을 명상할 기회로 삼는다. 사물(事物)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느니.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수(身手) 언변(言辯) 서적(書跡 문필력) 판단력 등의 넷은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인물평가의 기준이었다. 지금껏 ‘쓸 만한 사람’의 표준으로 회자(膾炙)된다. 낡긴 했지만 괜찮은 기준이다.

신수는 환해야 하고, 언변과 문필은 옳은 생각을 옳게 드러내야 한다. 판단력, 수천 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 생사의 벼랑에 선 그 상황에서 장부가 어찌해야 하는지, 여기서 그렇게 풀어본다. 사람의 인문적(人文的) 성품들이다. 

평소의 깊은 생각이 정확한 판단을 부르고, 과감한 실천의 거대한 용기를 준다. 충무공 이순신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 맞는가? ‘명량’과 ‘한산’도 못 봤는가? ‘장군’의 지위로 간주할 수 있는 그들의 당시 행태를 세금 내는 시민들은 황당하게 바라본다. 사람 맞아?   

그 중 하나 아니면 두엇이라도 제대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더라면, 우리는 저 귀한 생명들 죽이지 않았다. ‘무한책임’이란 말 진심이라면, 당연히 이 상황은 살인(殺人) 또는 학살(虐殺)로 보일 터.

말은, 뜻을 알고 내놓아야 한다. 유식한 체 말고, 정직해야 말이다. 속셈 검으면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라도 드러난다. 저 장부론(丈夫論)도 기록으로 남는다. 

인간은 유치하여 비참하다. 본디다. 빅토르 위고의 ‘미제라블’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