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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향토학의 방법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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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향토학의 방법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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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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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내 고장의 ‘우리 역사’는 이렇게 세워야 한다. 

지역 지식인들이 내 고장의 아름다운 문물과 의의를 논의하고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역학 향토학 향토사(鄕土史) 등의 이름으로 뜻 있는 이들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관청이나 (지역)문화원 시민모임 지역언론 등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요강(要綱)이랄까, 참여하는 이들이 앞서 ‘마음’을 맞춰야 대목들이 있겠다. 최근 몇몇 시(市) 군(郡)의 자문(諮問)에 응한 내용을 대략 간추려보았다.

여러 종류의 역사나 역사기록의 방법은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사나 한국사를 대학 등에서 정해진 절차와 격식(格式)에 따라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특성이 이 분야(향토학)의 본디 또는 특성일 터다. 그중 하나는 ‘긍지의 발로(發露)’라는 점이다. 

‘우리 고향은 말이지요.’로 시작하는 기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설렘이 바탕에 깔리는 자부심이다. 어느 곳이건 마찬가지겠지만, 각각의 전통과 리더십의 차이에 따라 ‘향토학’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 또렷한 차이를 보이겠다.  

그러나, 혹 ‘정격(正格) 학문’이 아니라고 해서 (역사적) 사실(事實)과 해석에, 또 그 표현의 엄정함에 빈틈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국가나 세계사적 공인(公認)과는 상관없이 ‘역사’를 다루는 꿋꿋한 마음이 전 과정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이외의 연구자, 가령 타 지역이나 ‘전국구’ 연구자의 시각(視角)이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는 구석까지를 살피는 것이 ‘긍지의 향토학(사)’의 의의일 터다. 

나와 이웃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의미’를 톺아보는 것의 속뜻이리니. 역사책이나 교과서에는 없는, 향토학(學)이나 향토사(史) 등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역사(서)는 왜(倭 일본)의 식민주의 침탈에 구겨진 채로 해방 이후 세대에 전해졌다. 친일의 잔재 또는 倭의 의도에 맞게 구부러진 기록과 이념들이 우리 역사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 문화가 극복해야 하는 부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공부의 품격과 진실성은 더 강조되어야 한다. ‘나’나 ‘우리’를 드러내 돋보이게 하고 싶은 의욕이 지나쳐 균형을 잃는 경우를 상정해 보는 것이다. 

자칫 그 내용이 신뢰를 잃을 경우의 타격이 ‘전국구’ 공부(역사)에 비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서울) 중심의 세상’의 부족함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 긍지도 손상을 입기 쉬운 것이다. 그 글의 당초 명분(名分)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이유다.

결과의 보람이나 내용의 흥미 등은 부수적인 소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미’를 우선 추구하는 것은 자칫 지역학의 내실(內實)과 독자(시민)의 호응, 둘 다 놓치는 지름길일 수 있다. 표현은 참되게, 우직한 것이 백 번 낫다.

‘이 사업’의 추진 주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혹 공공(公共)의 이익이 아닌 일부 (토호) 세력이나 정치인들의 의도를 뒷받침 하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 같은 (마음) 자세나 방법론은, 표현의 측면에서도 똑 같이 엄정해야 한다. 집필자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글(문장)은 기술(技術)이 아니고 마음(생각)이다. ‘잘 써야 한다.’ ‘글재주가 좋아야 한다.’는 흔히 듣는 말은 ‘글’에 대한 편견(偏見)이다. 이런 편견은 글의 과장이나 왜곡을 부르기 쉽다. 지나치면 실질적인 ‘거짓말’이 된다.

이런 경우 그 글이나 책은, 자칫 이웃과 후손을 오도(誤導)하는 부작용을 빚을 수 있다. (下편 ‘향토학 집필의 실제’ 글에 계속됨)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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