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기고] 우리 동네 다방
상태바
[기고] 우리 동네 다방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10.26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1980년대 김포평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가을 추수 때가 되니 정미소와 그 옆의 벼 말리는 건조장마다 문들을 활짝 열어 제치고 추수 준비들이 한창이다. 사람들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건조장 출입구로 드나드는 것이 개미들이 개미집 들락거리는 것만큼이나 분주했다.

아침부터 수많은 일개미 중에 여왕개미 같은 존재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다방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찾아다니는 마케팅이라 하여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논두렁 밭두렁을 넘어 다니며 차 배달을 해주었다. 또 얼린 물을 한 통씩 갖다가 분배해 주곤 했다. 이때 몇몇 사람은 그 바쁜 와중에도 다방 아가씨와 마주앉아서 커피 잔을 마주한다.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집사람과 나누기조차 꺼려지는 걸쭉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다.

이런 장면은 일상생활이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데 땅바닥에 주저앉은 무리들 중에 한 명이 손을 흔들며 커피 한잔하라고 큰 소리로 부른다. 자판기 커피에는 비교도 안 되는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따르는 사기진작의 커피 좀 마셔 보라한다. 그 말에 거들떠도 보지 않자, 다방 한번 가 보았냐는 등 야유를 해댔다. 다방 한번 가 보았냐는 야유 소리에 불현 듯 그때 그 다방이 떠올랐다.

아마 내 나이 서른 초반이었을 때였다. 어느 날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 위하여 인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중도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니, 집이 몇 채밖에 없는 곳이라 버스가 떠나간 후로는 한적하다 못해 고즈넉했다. 외출한 친구가 지금 귀가 중이니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친구 부인의 말을 사양하고 버스에서 내릴 때 보았던 다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 앞 건물 이층에 있는 허름한 다방을 올라갔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저히 실내에 들어온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기온이 바깥온도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다방 안의 정경은 요즈음 같으면 토속적인 실내 장식이라고 점수를 후하게 주겠지만, 좀 심하게 말해서 시골 창공 의자와 테이블 몇 개 갖다 놓은 것 같았다. 학교 교실에나 있을 법한 녹이 슨 커다란 무쇠난로에다, 이발소에서 면도할 때 비누칠한 솔 문질렀던 것처럼 누런 거품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는 연통하며, 보는 것마다 눈길하나 정 붙일 곳이 없었다. 한쪽 벽 선반에 얹힌 TV는 방송국의 아나운서나 탤런트들이 거의 다 퇴근을 했는지 화면은 깜깜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추워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는데, 실내온도에 어울리지 않게 뜨겁게 끊인 커피를 갖고 온 주인인 듯한 중년의 여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주인 눈치 보지 마시고 손님이 알맞은 온도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장작을 알아서 넣으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작불의 열기가 아닌, 그 말의 느낌만으로도 온몸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인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애정 어린 눈길 하나 줄 곳 업었던 다방 안의 모든 사물에 애정의 시선이 갔다. 읍내 다방에나 있는 ‘울어라 열풍아’가 흘러나오는 뮤직 박스가 없으면 어떠하고, 난로 통이 지저분하면 그것 또한 어떠랴. TV가 안 나오면 조용한 대로 좋았으며 이따금씩 지나가는 바람에 덜컹대는 창문 소리에도 관대해졌다.

이따금씩 장작 타는 소리만 날 뿐 다방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다방 테이블에 있는 ‘오늘의 운세’라는 쪽지가 나오는 재떨이 대신 다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농민’과 ‘선데이 서울’이 있는 다방 같지 않은 다방에 점차 마음이 갔다.

창밖 북쪽의 상수리나무의 낙엽이 바람에 싸르르 싸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남쪽의 선팅 안 된 창문으로는 언 땅에 내린 서리가 달빛에 하얗게 보였다. 멀리 달빛이 메우고 있는 산골짜기에서 조용한 음악이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검은 산 그림자 밑에 있는 친구의 집은 네모진 불빛의 작은 창문 윤곽만 보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하행선 막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에 밑에 가게 덧문 닫는 소리가 들리는 소리에 친구는 만나지도 못하고 다방 문을 나섰다. 토속적이라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추억의 다방이 커피 한잔으로 또 생각이 난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