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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동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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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동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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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2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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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염려하던 일이 결국 터졌다. 마을 앞을 가로질러 왕복 4차선인 김포 시가지 우회도로가 완공되었는데, 육교는커녕 신호등도 없다. 등교하는 학생들이나 읍내에 볼일이라도 있어 나가려는 사람들은 눈치껏 건너야 하는데, 말은 눈치껏 이라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판이다. 위태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동네 할머니 두 분이 새벽 미사 갔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이들 학교 등교시키다가 아차! 하는 날에는 증조할아버지 사시는 세상에 있는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게 생겼다.

관공서 출입이 좀 잦고 말이나 좀 한다는 몇몇 사람 붙잡고 얘기 해 보니 형편은 딱하기는 한데, 귀찮고 바쁘고 하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갔으면 하는 눈치다. 데모안하기로는 시청에서 알아주는 동네라 데모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몇 사람들의 학부형들을 만나서 등교 거부라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자고 말하였다. 아이들 학교를 빠지는 것을 죽는 것만큼이나 무섭게 말하는 퉁에 맥이 다 풀렸다.

그 당시에는 요즈음에 일어나는 일인시위라는 것도 모르는 시대라 횡단보도 자리에 현수막이라도 한 장 걸어 놓기도 했다. 얄팍한 주머니 털어 가며 사정하니 그러한 일에 사용한다면 싸게 해 준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요구하는 주최 측의 이름을 적어야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다. ‘걸포리 주민일동이라고 썼다가는 동네 주민들을 우습게 보는 관의 횡포로 현수막이 한나절 붙어 있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에는 종교단체가 힘을 발휘할 것 같아서 교회에 다니는 아내에게 말을 해 봤다. 아내는 난색을 표하며 우리 마음대로 교회의 이름을 차용했다가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교회에서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 했다. 결국 내가 다니는 천주교회 신부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화로 내 얘기를 듣던 신부님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구역장이란 직책이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구역장의 기도 열 번보다도 현수막 한 장이 더 효력이 있을 것이라며 흔쾌히 김포 천주교회 교인일동이라는 글을 사용하도록 윤허를 내리셨다.

그러며 어떠한 내용으로 쓸 것이냐고 묻는 말에, ‘신속히 신호등을 설치해 달라!’라고 말했더니, 현수막은 짧은 글로 강하게 어필하는 맛이 있어야 하니 걸포리 사람 다 죽겠다!’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무튼 구역장이 하는 일이니 알아서 잘하라며, 도움 청할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며 격려까지 해 주셨다.

우리 동네 주민의 요구사항이 적힌 새하얀 현수막이 나 여기 걸렸으니 보라는 듯이 바람에 파스닥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신호등을 설치해 달라고 그렇게 찾아가 읍소를 했을 때는 묵묵부답이더니, 현수막을 걸은 지 두 시간도 안돼서 읍사무소에 당신이 현수막 걸은 사람이냐는 고자세가 역력히 배어 있는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 (), ()이 민, , 군으로 명칭이 바뀌는 과도기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관공서 직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이기도 했다.

당신이 설치한 현수막은 불법부착물이란다. 강화 방문하는 도지사가 지나가기 전에 떼어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삼국지를 보면 약간의 군사로 트릭을 써서 조조의 대군을 기만했던 장비의 장판교 작전이 생각나서 나도 기만전술을 쓰기로 했다. 현수막을 내가 달기는 했지만 관리는 천주교인들이 하느니만치 천주교회로 전화하라고 둘러댔다. 아울러 거짓말을 섞어 천주교인이 사천 명이며 그 교인 중에 현수막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줬다.

관공서 직원은 왜 걸포리 주민들의 일에 천주교인이 개입했냐고 조금 전과는 달리 목소리에 힘이 빠진 채로 말했다. 천주교인이 대다수인 걸포리 주민이 새벽 미사 길에 교통사고을 당했기 때문에 부득불 취한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도지사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만, 현수막의 색깔이 바래지고 제 스스로 운명이 다할 때까지 붙어 있었다.

예산이 없어서 일 년 안에 신호등 설치가 힘들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신속히 신호등을 설치해 달라!’라는 현수막의 힘이 영험했던지 현수막 내용처럼 신속히 신호등이 설치되었다. 마을사람들이 길을 건너려고 붉은 신호등 기둥 옆에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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