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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추나무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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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추나무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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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1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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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어렸을 적 우리 뒷집에 꽤나 큰 대추나무가 있었다. 뒷집의 옆집, 그리고 우리 집에도 대추나무가 있었다. 부모님 결혼식 폐백 때 조율(棗栗)수 대로 자식을 낳았는지, 우리 형제가 십 남매였다.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먹을 것 하나 들고서도 손자들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하여 운신의 폭이 좁았다고 했다. 자식들이 대추나무에 대추 달라붙은 듯 한집에 약주 잡숫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얼굴이 대추 빛이었고, 어머님이 연세 들어 돌아가실 때의 주름살이 대추결이었다.

대추나무를 보면 부모님이 살아오신 삶을 알 수가 있다. 부모님은 일제치하와 6․25의 격동기를 한겨울의 삭풍처럼 격은 흔적을 육신으로 나타내셨다. 대추나무 또한 폭염과 혹한의 시달림 속에서 가지 한 번 마음껏 뻗어보지 못하고 비틀림과 옹이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처럼 외적으로는 거칠고 꼿꼿하지 못하나, 그 단단하기에는 많은 수종에서도 상위에 속할 것이다. 힘없고 볼품없이 쭈그러진 대추 속에 돌같이 단단한 씨앗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대추씨를 보면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어머니의 모성애가 떠오른다.

아버지께서는 외양이 잘나지 못했으면 속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대추나무가 그렇다. 모양새를 보면 곧지 못해서 목재로서는 가치를 못 느끼지만, 야무지리만치 단단한 재질로 가구나 도장을 새기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그중에서도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재료의 명품으로 꼽혀 많은 사람이 선호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역경을 이겨낸 것을 뜻하는 말 같아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 도장을 구입했다.

오일장에 나갔더니 이동식 도장포가 있었다. 수정과 옥으로 된 도장을 구경을 하다, 구전으로만 들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 얘기를 하니 마침 그 재료로 만든 도장이 있단다. 도장 손잡이를 구름이 감아 돌고 학이 날갯짓을 펴낸 것이, 도장 새기는 입담 없이도 사람을 홀렸다. 도장포 주인의 말로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길조인 학의 그림도 좋게 새겨져 있고 하여, 금시발복하여서 자손만대로 번영을 누린다고 했다. 그 도장에 이름 석 자만 새겨 넣기만 하면 흥부 박 터지듯 재물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하여,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한문으로 이름 석 자를 새긴 것이다.

아내에게 벼락 맞은 대추나무도장이라고 보여 주니 코웃음을 치며 미친 대추나무 도장이나 아니면 다행이라고 응수했다. 아내가 말하는 미친 대추나무란, 대추나무에 병이 걸리면 대추나무 잎이 댑싸리 잎처럼 잘게 생기며 일단 대추가 열리지 않아 대추나무 구실을 못한다. 미친 대추나무 병에 걸리면 베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도장을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신성한 장소에 보관하고, 임금님이 옥새 다루듯 하면서 재물이 굴러 들어올 법한 일에다 도장을 꽝, 꽝, 찌어댔다.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출두장이 날아들었다. 친구가 마이너스 통장 만든다 하여 도장 한번 찍어준 것이 사단이 난 것이다. 급기야는 내 땅에 경매 절차가 들어온단다. 큰일이다. 땅을 싸게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친구가 갚지 않은 돈을 갚으러 은행에 갔다. 믿었던 친구였는데 허탈하여 웃음이 나왔다. 속도 모르고 은행 직원이 행원 생활 이십여 년 동안 보증인이 웃으면서 돈 갚으러 오는 분은 처음 봤단다. 그럼, 울면서 갚으면 깎아주기라도 하냐고 반문하니 여유 있는 농담도 즐기신다고 말했다.

그 돈을 갚고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그때의 인감도장이 하필 복이 굴러 들어온다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이었다. 친구 보증 섰다가 그야말로 벼락을 맞았는데, 벼락 맞은 대추나무 도장으로 액땜 막듯 꽉 눌러 찍었다. 아무래도 속은 것만 같았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아니라, 미친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인 것만 같았다.

동네 조카님이 웃으면서, 쫓겨나지 않은 것 보면 아주머니는 잘 얻었다고 빈정대듯이 말했다. 미친 대추나무는 잘라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데, 아내는 미친 녀석 쫓아내지도 않고 밥 한상 차려주며 말했다. “대추나무는 벼락 맞으면 값이 올라 귀하게 쓰이고, 미치면 잘라버리기라도 하는데, 이놈의 인간은 벼락을 맞고 미쳐버렸으니 어이 할지 모르겠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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