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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단비’의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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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단비’의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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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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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자우(滋雨)라지요? 갈망하던, 비가 오시네요.

일전(日前) 남도 벌교의 인문학운동가 김성춘 선생이 반가운 말씀 전해왔다. 기뻐서 ‘자우’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비가 오신단다. 비 소식에 밤새 설렜다. 더 오셔도 좋으련. 

자우(滋雨, 慈雨)는 ‘식물이 자라는 데에 알맞게 내리는 비’ 또는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단비’다. 다디달다, 달다(甘)는 뜻 감우(甘雨)다. 산불도 끄는 비, 나무와 풀에도 단비일 터. 

滋는 (물이) 불어나거나 (생물을) 키운다는 뜻이다. 慈는 (키우는 마음 같은) 사랑이며 어머니란 뜻이다. 바탕 글자인 무성할 자(玆)는 풍성하게 드리워진 실타래 그림이다. 낙낙하다.

문자의 구조로 보자면 자(玆)의 낙낙함에 물 수(水,氵)와 마음 심(心)이 붙어 저런 평화로운 의미를 지었다. 비 雨(우)는 하늘에서 내리는 물(방울) 모양을 떠올려 상상하자. 

물은 생명(의 뜻)을 녹여 보듬었다. 가물어야 비로소 느끼니 인간은 참 어리석다. 

기후위기의 파고(波高)인 것을 실감한다. 더 통렬(痛烈)하게 절감(切感)해야 한다. 대개들, 특히 (좀 있는 나라) 위정자들은 ‘강 건너 불’ 아니면 ‘너 먼저’ 하며 손사래를 일삼았다. 이제는 지들도 급해지리라. 우리도 (가뭄으로) 급해졌다. 우리(인류)의 일이다. 화급(火急)하다.

자우의 뜻으로 서우(瑞雨) 혜우(惠雨) 택우(澤雨)가 있다. 상서(祥瑞)롭다, 은혜롭다, (연못처럼) 윤택하다 등의 뜻에서 붙은 이름이겠다. 

한자(文字 문자)는 글자마다 독립된 뜻을 갖는 하나의 단어다. 그래서 이렇게 글자끼리 붙여 적절한 뜻을 빚는다. 우리 한자어도 마찬가지다.

고풍스런 말로 뜻 알고 살려 쓰면 더 멋질 시우(時雨·때 맞춰 오는 비) 고우(膏雨·생물을 살찌게 하는 비) 적우(適雨·적당한 비) 호우(好雨·좋은 비) 영우(靈雨·영험한 비) 등도 떠올리자.

글 짓고 있는 이 시간은 아쉽게도 이슬비만 내린다. 보슬비 가랑비 안개비다. 비슷한 한자어로 연우(煙雨)가 있다. 이와 흡사한 ‘는개’라는 비의 예쁜 우리말 단어를 알고 활용하는 이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실비 또는 은(銀)실비라는 이름도 곱다. 

(나의) 말글 능력은 튼실한 틀(프레임)과 어휘(語彙·말 무더기)로 구성된다. 어휘가 크면 좋은 글 읽고, 큰 글 쓴다. 이 대목을 빠트렸던 것이 우리 (언어)교육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말귀 어두워지니 어처구니없는 피싱사기에 쉬 속지 않는가. 내 세금을 집행할 좋은 정치인을 선별하는 민주역량도 크게 떨어져 있겠다. 인성(人性)의 문제도 관련 클 것으로 본다. 

한국어사전 영어사전만 아니라 한자사전(자전)도 활용하여 글자의 뜻을 새기는 것을 생활화한다면 문해력은 물론 작문과 사색(思索)을 위한 귀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한참 전에는 ‘사전을 통째 씹어 먹었다.’는 이가 학교에 서넛씩 있었다. 한 장씩 외우고서 (말 그대로) 먹었다는 것이다. ‘어휘의 산(山)’을 내 것 삼은, 뛰어난 공부꾼들이었다.  

말과 글, 외피(外皮)와 속뜻, 그 함의(含意)와 철학을 공부하면 ‘공부 중 최고’는 역시 사전이라고 한다. 서너 걸음 돌아가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 열 배는 크고 빠르고 확실한 성과를 준다. 말귀와 글눈 즉 문리(文理)를 터득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랄까.

‘문리’는 정직함이니 ‘쉽게 가자’는 요령이나 첩경(捷徑 지름길), 편법을 주지는 않는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갈래 길, 귀한 기회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한다. 챗GPT의 새 시대, 베끼지 않으면 (나를)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이제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인공지능이 나를 바라보는 상황이다. 

단비를 계기로 풀어본 ‘미래언어학’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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