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엿장수와 합리적 취객, 비유는 가소로울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1905년 황성신문에 장지연(張志淵)이 쓴 논설 제목이다. 을사조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공박한 글이다. 당연히 국민이 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는 뜻이 담겼겠다.
최근 어떤 글에서 시일야방성대소(是日也放聲大笑)라고 곡(哭·울다)을 소(笑·웃다)로 바꿔 썼더니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본 듯한 그 글귀가 떠올랐던 것이리라.
‘오늘 소리 질러 크게 웃다.’는 뜻이다. 하늘 바라보며 한껏 웃는다는 앙천대소(仰天大笑)란 말도 있다.
웃을만한(可笑 가소) 일 드문 세상에 에피소드 즉 일화(逸話)일망정 큰 웃음 준다면, 좋은 일이겠다. 이야기의 가치는 정작 비유에 있다.
첫 얘기, 국민학교(옛 초등학교) 운동회 때 엿장수 가위질 소리에 정신 놓아버린 아이가 자기 집 ‘대단한 물건’을 몰래 들고 나와 엿 바꿔 먹었다. 먹을 것 없던 시기, 흔한 얘기였다. 그 물건이 뭐였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물건의 대단함과 엿의 달콤함을 비교 견적(見積)할 요량이 아이에겐 없었겠다. 부모와 주위의 거센 항의에 엿장수는 (그 기막힌 거래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웃자고 떠올린 기억 속의 실화(實話)지만, 저건 사기(詐欺)다.
한일 간 현대사 사안들과 최근 양국 정권의 장군멍군 대작을 보며 운동회의 그 일화가 떠올랐다. 박근혜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물리라고 소리치는 주인(국민)의 소리 크다.
‘역사의 판단’을 보다고 한다. ‘역사가 판단할 국민’은 누구인가? ‘소리치는 저 국민’과 다른가? 안중근 장군은 어떤 국민인가? 왜의 ‘대정치가’ 이등박문를 암살한 역적 (국민)인가?
두 번째 얘기, 찰스 테일러라는 캐나다의 철학자가 제 논문에서 활용해 유명해졌다는 ‘취객(醉客)의 합리성(rationality of the drunk)’이라는 비유다. 최근 네이버의 강연에서 인용됐다.
<술 취한 이가 늦은 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뭔가를 찾고 있다. 과객이 뭘 찾느냐 묻자 현관 앞 캄캄한 구석을 가리키며 "현관 열쇠가 저기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왜 현관 앞 말고 여기서 찾느냐고 묻자 취객은 "이곳이 (저기보다) 훨씬 밝기 때문이죠."라고 답한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동아시아의 일화도 있다. 뱃전에 칼 떨어진 자리를 표시하고서 물에 빠뜨린 그 칼을 거기서 찾겠다고 나선 사람도 저 취객과 다를 바 없겠다. 애먼 데 짚었다. 번지수 틀렸다. 왜 남의 다리 긁니? 콩 심은 데서 팥 나랴?
비유(比喩)의 뜻과 효용은 동양적 덕성(德性)이다. 불확실한 미래가 품은 실존적(實存的) 위험성까지 (덜 아프게) 꼬집거나, 백신처럼 찔러 섭리(攝理)가 흐르게 한다. 어진 이들이, 인류 역사상의 큰 종교가들까지 즐겨 선택한 방법론이다.
사무사(思無邪)는 공자가 시경(詩經)을 설명한 뜻이다. 詩는 비유 자체다. 시는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사특한 생각을 지워주는 것이다. 그 실존적 의미는 ‘다른 선택(another choice)’이라는, 서양 사상가 마키아벨리나 헤르만 헤세의 핵심이기도 하다.
혹 리더십(지도자)이 제시하는 번지수가 어긋나고 있다면, 다른 여러 국민들이 소리치는 것을 들어서, 조정(調整)하라. 각료(閣僚) 아니라도, 공공(公共)의 인간에게 이는 엄정한 의무다.
是日也放聲大笑, 통곡(痛哭)할 일은 아니다. 고로 웃자. 허나 하찮은 일일까? 본질을 보면 더 크게 웃을만하니, 가소롭다 여겨 하늘 보고 다만 웃자.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