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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한국사회 병 ‘끗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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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席] 한국사회 병 ‘끗발’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23.06.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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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이력서’를 100번 이상 쓴 구직자가 적지 않다는 조사가 있었다. 몇 해 전,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채용포털과 함께 20세 이상 구직자 1236명을 대상으로 시행했다는 조사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청년 구직자 680명 가운데 4.3%가 ‘입사원서’를 100번 이상 냈다. 중장년 구직자 556명의 경우는 그 비율이 9.3%로 청년 구직자의 갑절을 넘었다. 청년과 중장년을 합치면 전체 구직자의 6.6% 가량이 입사원서를 100번 이상 냈다고 했다. ‘100번 이상’ 입사 지원을 하고도 취직에 실패한 구직자가 이같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끗발’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정치판은 이른바 ‘가족채용’이 문제되고 있었다. 국회의원의 몇 촌 조카의 동생, 동서 등 ‘복잡한 족보’의 친·인척 채용 압력이다. 그 가족채용이 ‘무더기’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여론이 도끼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끗발’로 기업을 압박하는 인사 청탁이나 압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중앙선관위의 ‘아빠찬스’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만, 그 ‘찬스’ 사례는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고위공직자 후보가 ‘아빠찬스’ 의혹 때문에 하차하는 경우는 잊을 만하면 들리고 있다. 아들의 ‘학폭’을 무마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진 사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20대 자녀가 자신의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값비싼 아파트를 사들이는 ‘부모찬스’도 있다. 그런 의심 사례가 276건이나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얼마 전 있었다.

‘아빠회사 찬스’로 ‘슈퍼카’를 몰다가 적발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법인 명의로 된 고급차를 가족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차량 구입비용, 보험료, 기름값 등은 모두 회사가 대신 내주고 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싫다는 아빠찬스도 빠뜨릴 수 없다. 입대를 하더라도 ‘귀족 복무’에 또는 ‘황제 휴가’를 즐기고 있다. ‘아빠찬스’에 ‘부모찬스’, ‘가족찬스’, ‘끗발찬스’라고 할 것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의 자녀들이 ‘아빠찬스’를 이용하여 경력직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채용되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두 사람 외에도 여러 명의 선관위 직원들이 자기 자녀나 형제의 선관위 경력직 채용과정에 손을 쓴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선관위의 채용특혜 의혹이 특히 문제 되는 것은 그 비리가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선관위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일종의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선관위의 조직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비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사회 일각에서 현대판 음서(蔭序) 도라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그런 까닭 때문일 것이다. 선관위는 사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이익단체가 아니다. 선관위는 특별한 법적 지위가 부여되어 있는 독립적인 국가기관이다.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선관위의 역할과 임무가 국가적으로 막중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하는 기관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농협을 비롯한 민간단체 선거에서도 그 관리를 선관위에 위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선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선거 이후의 말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관위는 선거에 관한 한 대한민국 최고 심판기관이다.

경기를 심판하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경기의 승패는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거라는 경기를 심판하는 선관위의 직원이라면 누구보다도 엄격한 공직자 윤리를 갖추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선거 결과가 나오더라도 낙선한 사람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란 대의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선거를 통해서 국민들은 자신을 대변할 대표자를 뽑고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한다. 그러기에 엄정하고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선거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정치세력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거나 정파 간 갈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모든 선거당사자들이 결과에 승복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선거를 관리해야 한다. 공정한 선거관리는 정파 간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여 정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관위 공직자들이 심판자로서의 직업윤리를 팽개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면 공정한 심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에 대통령 측근을 앉힌 문재인 정부 시절의 인사나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사전투표지를 소쿠리에 담아 보관한 사건, 최근에 불거진 선관위 전산망에 대한 해킹시도 논란 등으로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태에서 말이다.

채용특혜 의혹은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사건이다. 최고의 공익을 추구해야 할 선관위의 채용비리 의혹은 선거심판자로서의 선관위 위상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렇기에 이번 채용비리를 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엄중하다.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TV와 메트릭스가 공동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3%가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국민 여론을 감안할 때 중앙선관위원들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과감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관위가 환골탈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관위가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공정한 심판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선관위의 미래도, 우리 정치의 미래도, 더 나아가 국가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조선 초 정갑손(鄭甲孫)이라는 ‘대쪽 관리’가 있었다.그 정갑손이 함길도 감사로 근무할 때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한양을 다녀왔더니, 그 사이에 향시 합격자 방이 나붙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인 오(烏)의 이름도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그 순간 정갑손의 수염이 꼿꼿하게 치솟았다. 정갑손은 불같이 화를 내며 시험관을 혼냈다.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여우같이 아첨을 하는가. 내 자식 오는 아직 학업이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인단 말인가.” 정갑손은 자기 손으로 아들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시험관도 그 자리에서 내쫓았다. 정갑손은 아들 오가 무능했기 때문에 합격을 취소시킨 게 아니었다.

오는 어렸을 때부터 똘똘했고 학문도 열심이었다. 효성도 남달랐다.오는 자신을 불합격시킨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중에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했다.오늘날 이런 대쪽이 있다면, ‘천연기념물’일까?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다.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나 책임을 뜻하는 말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해야 할 가진 자들이 아빠 찬스를 쓰면 쓸수록 공정과 정의로운 사회는 무너질 것이며 국민들간의 이질감만 커질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진 자들의 도덕적 양심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noblesse oblige라는 표현의 원조를 굳이 찾자면 BC. 8세기경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lliad)에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때론 비아냥 대는 표현으로 쓰기도 하지만, 서양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발달되어 있다. 노블레스 오빌리주는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것이다. 1808년 프랑스의 정치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당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등 어수선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사전 르 프티 로베르(Le Petit Rovert)는 노블레스 오빌리주에 대해 “귀족 계급이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로 자신의 명예는 스스로 만들어 낸다.”라고 풀이했다. 민중서림의 ‘불한사전’ “양반은 양반답게 처신해야 한다.”(격언)고 풀었고 ‘뉴에이스 영한사전은’은 “높은 신분에 따르는 정신적 의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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