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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오성장군 김홍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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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오성장군 김홍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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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1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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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1908년, 만주의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학교라는 이름의 학교가 세워진다. 1925년 폐교까지 17년 동안 시인 윤동주,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 할 영화감독 나운규를 비롯해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김약연이라는 분이었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들을 확보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자기는 조밥을 먹었지만 교사들을 위해서는 40리(약 15㎞)나 떨어진 용정까지 사람을 보내 쌀을 사왔고 쌀은 늘 떨어뜨리지 않았다. 교사들은 송구스러워했으나 김약연은 그때마다 그 정신을 2세에게 바치라고 했다니 어느 정도 정성이었는지 짐작이 된다.

어느 날 명동학교에 평안도 청년 최세평이 나타났다.워낙 몸이 날래고 총명했던 그는 명동학교에서 체육과 수학을 가르치게 됐다. 새끼줄을 감아 만든 공으로 축구를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던 최세평 교사에게 난처한 문제가 생긴다. 마을의 한 처녀와 사귀게 됐는데 그 성이 최씨였던 거다. 1920년대 조선인들에게는 최씨끼리의 연애란 ‘불륜’ 비슷한 일이었다.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러나 최세평은 뜻밖의 고백을 한다. “제 이름은 최세평이 아니라 김홍일입니다” 그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 활약하던 오산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경찰을 때려눕히고 망명길에 올라 중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뒤 독립군에 투신하여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바로 그 김홍일이었다. 이후 김홍일은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고 중국 국민혁명군, 즉 장차 중화민국 정규군이 될 중국국민당 군대에 투신했다.

중국군 소속으로 숱한 전투를 치르고 계급도 올라간 그는 1931년 무렵에는 상하이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병기창은 각 군부대에 지급될 무기를 지급하는 곳이다.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일제 관헌이나 일본군을 직접 타격하려던 백범 김구에게 중국군 병기창 장교 ‘왕웅(王雄:김홍일의 중국식 가명)’이란 그야말로 어둠 속의 촛불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천왕에게 던진 이봉창의 수류탄 역시 왕웅의 병기창에서 나왔다. 일본은 상하이에서 일어난 일본인 살해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압박했고 급기야 1932년 1월 28일 중국군을 공격하기에 이르자(1차 상하이 사변) 김구는 중국군 병기창 주임 왕웅, 즉 김홍일과 함께 일본군 격납고와 함정을 폭파하기 위한 공작을 꾸미지만 중국이 쉽사리 저항을 포기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과 던지지 못한 물통 폭탄도 김홍일의 작품이었다.

이후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장성(將星)까지 진급해 그는 이제 때가 왔다는 백범 김구의 말에 거침없이 중국 군문을 박차고 광복군에 합류한다. 임시정부와 미국 전략 사무국(OSS)이 기획했던 국내 진공작전의 책임자로서 수도 서울 진격을 꿈꿨지만 원자폭탄을 얻어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한국군에 입대하고 곧 장군이 돼. 엉성한 독립군의 일원으로 외국 군 장성을 지낸 군인이 나이 쉰이 되어서 제자리를 찾고 한국전쟁은 또 한 번 그를 시련으로 몰아 넣었다. 대통령은 변장하고 목포까지 가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탈출하고 참모총장이란 이는 병력의 50%가 한강 이북에서 전투 중일 때 한강 다리를 폭파하였고  미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전 국토가 넘어갈 판이었다.

그때 기적처럼 나타난 이가 김홍일 소장이었다. 연대 단위를 지휘해본 경험자도 드물었던 한국군에서 김홍일은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본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는 경기도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절체절명의 임무를 맡았다.

중국에서 만주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김홍일은 거의 전력이 붕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미소로 병사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애초 미군의 요구는 사흘만 버텨달라는 거였다. 그 전에 한국군이 무너진다면 미군은 부산에 상륙했다 해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선언과 함께 김홍일 장군과 허약하기 그지없던 한국군은 무려 일주일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김홍일 장군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중장으로 예편하고 중화민국 대사로 나가게 됐을 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그를 치하했다.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5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5성 장군과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김홍일 장군에 대한 평가만은 기꺼이 동의하고. 그분은 대한민국의 5성 장군, ‘원수(元帥)’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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