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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단재선생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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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단재선생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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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0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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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1543년은 9월 23일, 100여 명의 포르투갈 선원들이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했다. 다네가시마는 가고시마(鹿兒島) 항에서 페리 선으로 약 3시간이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이 섬에 도착한 이틀 후인 9월 25일, 당시 15세에 불고했던 다네가시마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를 만났다. 그때 포르투칼 선원들은 도키타카 도주에게 소총(小銃)을 보여주자 도주는 “보기 드문 보물”이라고 좋아하면서 장래(將來)를 생각하여 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당시에는 이를 철포(鐵砲)라고 했다. 

도주인 도키타카는 구입한 철포 두 정 중 한 정은 수하의 승병 장군에게 주고, 다른 한 정은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에게 보내 그 소총을 모방해 새로운 총을 만들도록 명했다. 대장장이 긴베는 도주의 명을 받아 총을 만들기는 했지만 격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긴배는 격발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외동딸 ‘와카(若狹)’를 포르투칼인 ‘제이모토’에게 시집(상납)보내고 그 대가로 기술을 얻어내어 소총 개발에 성공했다. 

그 후 이즈미(현 오사카) 상인들이 들어와서 철포 제작 기술을 습득하여 교토 주변까지 철포는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6년 후 1549년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그 철포 500자루를 구입한 후 그 철포로 1575년 6월에 다게다 가쓰요리(武田勝?) 부대를 전멸(全滅)시키고 제1차로 일본을 천하통일(天下統一) 시켰다. 

일본이 철포를 개발한 지 11년이 지난 1554년 5월,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총포를 소개하자 군국기무를 관장했던 비변사(備邊司)가 명종(明宗)에게 총통(銃筒)을 주조(鑄造)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명종은 비변사의 주청을 거부하고 말았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1592년 일본은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철포(소총)를 앞세워 조선을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전란을 겪으면서 철포의 위력을 확인한 조선은 1589년 7월에야 공식적으로 철포를 도입하게 되었다. 

그러면 조선은 왜 철포를 최초에 접했던 1543년에 도입하지 않았던가? 1543년은 조선 최초로 서원(書院)이 설립된 해였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이었다.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鄕校),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官學)이 중심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書齋)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그런 서원의 설립목적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한 선비들을 육성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과 가문(家門)의 이익에 앞장서는 지식인들을 양산하는 역할을 했다. 서원에서 공부한 향원(鄕員)들은 겉으로는 군자(君子)인채 했지만 실제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에 헌신(獻身)하는 것은 뒷전이었고 패거리와 파벌(派閥)을 만들고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앞장섰던 사이비 선비들이었다. 

동일한 시대를 살면서도 일본은 포르투칼 선원으로부터 철포를 구입하고 개발한 실용의 길을 걸었다. 불과 15살 밖에 되지 않았던 다네가시마 도주가 철포를 개발하도록 명하고 그 명을 받은 대장장이는 자신의 딸을 포르투갈 선원에게 시집보내면서까지 기술을 훔쳐내어 개발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세월을 죽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총(철포)이 칼보다 강한 무기이니 만난을 무릅쓰고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선은 철포를 새 잡는 데 사용하면 좋겠다고 해서 조총(鳥銃)이라고 했다. 그렇게 당파를 가르고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런 국가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지역정서에 매달리고 감정싸움에 매달리는 오늘의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런 준비 없이 갑론을박만 계속하다 임진왜란을 당했던 400여년 전의 불행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의 참화를 정리해 적은 “징비록(懲秘錄)”에서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있었던 7년간 강산은 초토화되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시체 썩은 핏물이 강을 이루었다”고 적었다. 

오늘의 우리 정치판을 정말 바로 보자. 일자리는 사라지고, 아파트값은 폭등하고, 꿈과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그런데도 힘있는 권력자들과 정치인들은 뒷구멍으로 땅 투기, 아파트 투기, 대입 서류 조작을 태연히 자행하고 있다. 그들의 평등과 공정은 이렇게 그들끼리의 평등과 공정에 지나지 않고 있다. 

100여년 전,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역설했다. 오늘도 당파싸움, 감정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이여, 그대들은 400여년 전 우리 강산이 초토화되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해야 정녕 속이 후련하단 말인가?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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