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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역사에서 배우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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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역사에서 배우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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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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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중국 같은 경우도 시작을 주나라로 본다. 주나라는 BC1100년 무렵에 시작해서 진시황제에 의해서 BC221년에 망했으니 900년정도 지속됐던 것이다. 그런데 주왕도 역시 무왕이 세웠다고는 하지만 바로 무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공단보, 무왕의 아버지인 서백창 그리고 무왕 이렇게 3대왕에 걸쳐서 이루어진것이 주왕조라고 볼수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3대가 걸렸다고 분석하고 있다. 영국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빅토리아조시대다.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그때는 영국이 전 세계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남북한이 합해서 22만km² 다. 영국도 24만km² 밖에 안된다.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닌데 이 나라가 전 세계의 쓸만한 땅덩어리의 1/3을 지배했었던 것이다.

백년전쟁(영국과 프랑스전쟁), 장미전쟁(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의 30년싸움)이 끝난 게 1485년이다. 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 다음 헨리 8세, 그리고 등극하는 왕이 엘리자베스 1세다.

엘리자베스 1세때 당대 유럽의 최강대국인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나중에 빅토리아 여왕 세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래서 결국 영국도 헨리 7세,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의 3대왕에 걸쳐서 이뤄졌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천하통일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진시황제는 BC221년에 중국대륙을 통일한다. 그런데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은 550년이 걸렸다. BC771년에 양공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주왕조 천자한테 "너의 땅을 가져도 좋다"라는 허락을 받은 때로부터 550년이나 노력을 해서 결국 진시황때 천하패권을 잡은 것이다.

로마도 BC753년에 건국이 됐다. BC326년에 삼리움전투가 있었고 타림투전투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에니전쟁이 있다. 포에니전쟁이 끝난 시기가 BC 146년이다. 그 뒤에 악티움전투가 있는 데 악티움전투는 BC31년에 있다.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주변을 다 차지하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300년이 걸렸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 제대로된 선비가 나오는 데 3대가 걸린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하나의 조직, 한 국가가 세계적인 패권국가, 세계적인 인류조직이 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은 꼭 줄여야할 비용으로만 인식할것이 아니고 탄탄하게 채워넣어야할 하나의 반석, 상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렉산더대왕은 자신의 애마 부세팔로스(Bucephalus)를 타고 정복전쟁에 나서면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세계사에 둘도 없는 미증유의 인물이다. 그래서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고 극찬했다. 알렉산더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고 부하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항상 승리의 여신이 함께한다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수족 같은 최정예 호위대, 장성급 참모진, 그리고 친위대로 알려진 80~100명의 유능한 장교급 행동대장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11년 동안 때론 무서운 속도로 수천 마일을 행군하면서 여러 차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인도에서는 화살이 그의 폐를 관통하기까지 했다. 천로역정 원정길에도 그는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군대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적군은 물론 사나운 산악부족들과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그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Darius Ⅲ)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아시아의 최고미인으로 알려진 다리우스 왕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포로로 잡혀온 절세미인들을 보고서도 “페르시아 미인들이 내 눈을 괴롭히는 군”하며 보좌진들에게 익살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후 비록 정략적이긴 했지만 페르시아 왕비의 딸과 결혼했고 부하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적극 추천하여 1만 명 가까이 짝을 맺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또 왕비 외에는 일체 첩을 두지 않았고 더욱이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전쟁과 폭염으로 인해 부상당하고 건강을 잃는 병사들이 속출할수록 그는 더욱 그런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던 인물이다. 이런 사실은 마케도니아의 공식적인 왕실일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그의 그러한 처신은 높아진 지위로 인해 조금씩 거리가 멀어져가는 죽마고우와 충신들의 눈을 의식한 것이라고 하니 그의 철저했던 자기관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이처럼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자기를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남을 정복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정복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갖추어야할 필수적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알렉산더대왕은 누가 봐도 어쩌다 운좋게 세계를 정복한 사람이 아니다. 최근 수없이 불거진 고위공직자들의 온갖 비리, 성폭행 및 성추행 사건들을 보고 있자니 알렉산더대왕의 권위와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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