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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91] “새끼 잃은 어미 새보다 슬픈 새가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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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91] “새끼 잃은 어미 새보다 슬픈 새가 어디 있으랴”
  • 서길원 大記者
  • 승인 2022.12.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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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올해는 ‘빼앗긴 목숨’들이 너무 많았다. 세밑에서 그들을 기억하며 슬픔을 눌러 밟는다. 엄동설한 어린 보리 싹 밟듯이 이 악물고 힘주어 밟는다. 덧없이 잊혀질지 모른다는, 내년에도 ‘빼앗긴 목숨’들이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한 장의 달력이 처연하다. 처연함은 막연한 감정이나 감성이 아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겪어야 했던 참담한 현실의 자각이다.

여느 해라고 다르지 않겠지만 올해는 ‘빼앗긴 목숨’들이 너무 많았다. 세밑에서 그들을 기억하며 슬픔을 눌러 밟는다. 엄동설한 어린 보리 싹 밟듯이 이 악물고 힘주어 밟는다.

덧없이 잊혀질지 모른다는, 내년에도 ‘빼앗긴 목숨’들이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잊혀지면 그런 ‘빼앗긴 목숨’들이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닌 1인칭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날 선 참회이기도 하다.

국가의 부재로, 물신의 탐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실존이 한순간 부재로 바뀐 한 해였다. 지난 12일에는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였던 고등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함께 갔던 친구 2명을 참사로 잃고 힘 들어 하다 심리치료까지 받았으나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세상은 어쩌면 숫자놀음처럼 이태원 참사 사망자가 158명에서 159명으로 늘어났다고 기억할지 모른다. 하긴 이 어처구니없는 이태원 참사 앞에서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인공지능보다 더한 기계음으로 책임을 회피했음을 기억한다. 그는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면서 “이건 축제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하나의 현상’은 내일도, 모레도, 새해에도 얼마든지 이런 참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말에 다름아니다.

뒤늦게 더블어민주당 신현영 의원도 “닥터카가 콜택시인가”라는 국민비난에 한몫을 했다. 의사 출신인 신 의원은 이태원 참사 당일 명지병원 재난의료지원팀(DMAT)의 긴급 출동 차량을 중간에 남편과 함께 탑승, 신 의원을 태우느라 '닥터카'가 참사 현장에 2~30분 정도 늦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신 의원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직에서 물러설 뜻을 밝히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현행법 위반 여부, 당시 행적의 적절성 등이 도마 위에 오르며 비판적 여론이 거세지는 모양새다.
이태원 참사가 국가부재를 드러냈다면 이곳 남도의 광주 땅에서 연초에 발생한 비극은 물신의 탐욕이 빚은 참사였다. 새해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1월11일 멀쩡하던 아파트 신축현장이 붕괴돼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그러면서도 한 가정을 책임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파트는 정작 자신의 부르터진 손발로 한땀 한땀 짓지만 언감생심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는 살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수사결과 아파트 신축과 관련 수억 원의 뒷돈과 뇌물이 오가고 여기에는 관련 대기업도 얽힌 것으로 드러났다.

비가 와도 사람들은 목숨을 빼앗겼다. 서울에서는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일가족 3명이 고립돼 숨지고, 포항에서는 승용차를 빼내기 위해 물이 차기 시작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갔던 주민들이 한꺼번에 8명이나 숨졌다. 그중 아들과 함께 내려갔던 어머니는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정부는 뒤늦게 ‘반지하 거주가구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반지하 공간을 주거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아파트 주차장 참변과 관련해서는 “신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대한 차수벽 설치를 의무화 하겠다”고 했다.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지만 이미 소는 잃어버린 뒤였고, 그렇다고 다시는 그러한 참변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재난 예방이나 대응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이 원인이 아니라, 충분히 예견 가능함에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전 불감증이 참사의 원인이라는 것을 뼈저리 확인한 한 해였다.

지금 이순간에도 떨어지고, 넘어지고, 깔리고, 부딪히고, 끼여서 어디에선가 안타까운 목숨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통계를 들자면 올 상반기 6개월 동안 6만1822명이 각종 산업재해로 숨졌다. 하루 6명이 넘는 수치다. 지켜주지 못한 목숨들이다.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층이지만 목숨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장관 목숨이나 국회의원 목숨이나 재해로 숨져간 목숨이나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자식의 몸 냄새’라는데 그들을 보내고 남겨진 목숨들은 또 어찌 살겠는가. 새끼 잃은 어미 새보다 슬픈 새가 어디 있으며, 어미 잃은 새끼 새보다 가여운 새가 어디 있으랴.

한 해를 보내며 단 하나, 잊지 말자고 분노하는 이유다. 묵념하듯 그렇게 조용히 분노하며 한 해를 보낸다. 잘 가라, 2022 임인년이여.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大記者
sgw3131@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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