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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시민사회단체는 사회통합을 위해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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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시민사회단체는 사회통합을 위해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어야 한다
  •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 승인 2021.03.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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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사회 갈등구조의 타파

똘레랑스(tolerance)는 관용의 정신을 말한다. 자신과는 다른 타인과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면 그 차이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관용은 처음 종교에 대한 자유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종교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지나칠 만큼 강하게 주장하기 에 자기와는 다른 종교를 거부하거나 배격하기 쉽다. 그런 이유로 칼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타종교에 대한 관용 정신이 생겨났다. 이후 이어진 시민혁명에 의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피부 색깔, 신체, 종교, 사상, 양성문제 등 여러 차이에 대해서 차별이나 무관심이 아닌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정신을 말한다.

프랑스를 다양성, 조화로움, 합리성, 독창성의 나라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똘레랑스(tolerance)란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귀중하면 남의 것들도 똑같이 귀중하며 자신이 존중받기 바란다면 남을 존중하라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된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 대신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정'이란 말이 외국어로 번역되기 어렵듯 프랑스의 '똘레랑스'도 우리말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정'이 감성의 표현인데 반해 '똘레랑스'는 이성의 소리라는 점이 차이가 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와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는 주장과 주장, 사상과 사상이 논쟁하는 데 있어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결국 감정적으로 싸우게 되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관용이 강조되는 사회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사회다. 내 이념과 신념이 내게 소중한 것이라면 남의 이념이나 신념 또한 그들에겐 똑같이 귀중한 것이다. 내가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이러한 점에서 관용은 이기주의와도 구분되어 진다.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러한 관용이 자리 잡는다면 학연, 지연, 지역이기주의, 또 선거 때마다 나오는 지역감정 등 나라 발전에 불필요한 요소들이 사라질 것이다. 관용의 정신인 ‘똘레랑스’는 그 의미를 되새겨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프랑스도 2000년대 들어와서 도전에 직면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모토가 무색할 정도로 중동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이 연일 이슈화되었다. 프랑스는 2004년에 공립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고기로만 요리하는 패스트푸드점은 테러범들이 모일 가능성이 크다며 단속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등 아랍계 이민자의 비율이 높은 유럽연합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대명사라고 하는 프랑스가 이러한 풍조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관용이 도전받는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결국 퇴색하였다. 무슬림 혹은 유색 인종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으며 파리 테러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지적된 것이다. 러시아, 폴란드, 스페인의 카탈루냐, 바스크에서 독재를 피해서 망명 온 사람들 중에는 엘리트 계급이 많았던 것에 반하여 무슬림 아랍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 중에는 문맹자가 많아서 범죄나 일탈이 많았던 이유에서이다. 중국인 이민자들도 현지 사회에 기여를 하기 보다는 부동산 투기만 열심이었고 빈민가 형성을 조장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서 온 일부 이민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벌여 이민자 집단의 전체 이미지를 망쳐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많은 주변 유럽 국가들과 이슬람 극단주의자, 일부 이민자들의 낮은 시민 의식 때문에 프랑스 사회는 큰 갈등을 겪고 있다. 이는 프랑스 스스로가 식민지에 고의적으로 우민화 교육을 시행해 온 국가이었기에 더 호된 결과를 자초한 것이었다. 2015년 11월에 수도 파리에서 테러가 벌어졌고, 2016년 7월에는 니스 테러가 일어났다. 2015년 이래 시도된 공식 테러는 수십 건을 넘고 있으며 2020년에는 종교적 이유로 프랑스 교사를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폭탄 테러뿐만 아니라 일상의 범죄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어서 프랑스는 위험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져 버렸다. 그리고 관광 수입 감소와 불안정해져가는 민심, 치안을 모두 개선해야하는 과제를 얻게 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반감과 높은 출산율로 인한 무슬림의 증가는 국민전선 같은 인종차별적인 집단이 등장하고 지방 의회에 당선자를 내며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인 장 마리 르 펜이 2002년 대통령 선거 2위에 올라 결선 투표를 치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시민단체의 발전은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의미는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된 단체를 말한다. 참여 민주주의의 등장으로 시민의 정치 참여, 관심 분야의 다양화로 정부 능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종류는 대표적으로 환경 단체, 소비자 단체, 인권 단체, 평화 단체, 여성 단체 등이 있으며 시민 사회의 활력 증진, 민주주의의 건강한 토대 구축, 정부의 정책 비판, 여론 형성, 대안 제시 활동, 국제적 연대 등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발하여 일상생활에서의 변화, 개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시민단체는 상당한 비판에 처해 있다. 재정 자립도가 취약하고 일부 명망가 및 사회 지도층 중심의 운영과 중앙 집중식 조직 구조, 과점적 체제, 영향력에 비해 사회적 책임성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 단체와 이익 집단의 활성화가 사회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으며 효율성만을 중시한 논리는 정치와 쉽게 연결되고,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민단체가 갖는 특권의식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다양한 입장과 활동이 뒤엉키면서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혼란과 갈등을 우려하기보다는 그런 혼란과 갈등을 사회적 의사 결정의 시스템 속에서 포용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이익 집단이나 시민 단체 등의 결사체를 만들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사회에서는 풍부한 사회 자산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시민은 결사체 활동을 통해 서로 동등하게 대하고 신뢰하며 사회적 이익을 위해 협조하는 태도를 배우기 때문이다. 개방적 태도, 관용, 신뢰, 네트워크로 형성되는 사회 자산은 시민 간의 협조와 상호 호혜 수준을 높이고 자발적인 시민 참여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사회 자산이 풍부한 사회에서는 시민 사회가 활성화되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정책 결정에 드는 비용과 노력이 절감되어 정치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지나치게 편향된 정치적 견해도 지양되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 친사회적인 대중조직이나 자원봉사자의 수는 별로 늘어나지 않은 반면에 엘리트 중심의 시민단체들은 우후죽순처럼 급성장하였다. 이 점에서 90년대 한국의 시민운동은 지자체의 사업을 목적으로 하거나 중앙 정치권을 대상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통제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민주제도 정착을 위한 정치 및 사회개혁이 요망되는 여러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태국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민주화 이후 엘리트 중심의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어 정치개혁과 정책제언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동아시아 시민운동은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 중앙을 향한 정치성을 지금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종래의 취약한 시민사회라는 동아시아 발전의 수준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시민단체는 과거 관변단체의 방식과 연장선상에 있다. 대한민국의 군사독재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많은 관변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 많은 시민단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특히 시민단체의 재정 자립도의 취약성은 순수성을 상실한다. 시민단체의 재정은 뜻을 함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후원하여 운영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고 기업의 사회공헌을 위한 후원을 유치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관변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는 대부분이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에 의존하여 기생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단체는 정치권으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단체 구성요건에는 정관상의 정치적 중립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인 중립은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회단체가 정치권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에 의존하여 기생하려는 생각부터 개선되어야 한다. 또한 시민단체와 일반사회단체를 정치적인 이유로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시민단체라는 용어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물론 이들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단체의 목적과 부합한다는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단체가 갖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공통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라는 용어가 정치적 성향의 편 가르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시민단체’ 라는 용어는 특정집단이 독점되어서도 안 된다. 기존의 관변단체뿐만 아니라 업종을 대표하는 이익단체를 제외한 모든 사회단체는 시민단체로 명명되어져야 하고 이에 합당은 위치를 가져야 한다.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고 지원 하는 것은 시민사회단체의 책임이다. 그 동안 정부는 시민사회의 기반 육성을 위해 충분히 지원하여 왔으며 이제는 스스로 독립하여야 한다. 정치권과 언론과의 암묵적인 결탁은 사회 부조리를 낳고 있으며 사회분열을 일으키고 이를 이용하여 단체를 존속시키려는 함정에 빠져있다. 그러한 그들의 위치는 결국 국민이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시민사회단체는 관용의 시각에서 스스로 변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관점에서 일반사회단체를 시민사회단체로 인식해야 하며,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의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의 존속은 공감하는 국민에게 달려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생각이 보편적 진리에 부합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은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격한 표현 방법은 지양되어야 하고 정부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적을 표현하는 제도적 환경이 다양하게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 정치권은 시민사회단체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없어져야 하고 언론 또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정당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waterwrap@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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